이미 술은 취했다. 사물이 조금씩 두겹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주량을 조금 넘어 었으리라. 친구 녀석은 돈이 한푼도 없다며 내게 계산을 종용하고 있었다.
'야 내가 보고 싶었던 만큼 그만큼 물리적으로 증명해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술 한잔 하자던 때와는 180도 변해 버린 희희덕 거리는 녀석의 그런 표정을 한번 두번 보아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따라 기분이 상하는 까닭은 녀석이 입고 나온 버버리체크 남방 때문이었다. 거칠게 여기 저기 구겨 지고 정리되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저 얇은 셔츠 한벌에 족히 30만원은 넘으리라. 이번주 주말에도 백화점 쇼윈도 앞에 있는 버버리 체크 치마 앞에서 정신을 놓고 있던 집사람 생각이 나서 심사가 뒤틀려 왔다.
'야 동내 호프집에서 500 몇잔 마실 돈도 없는 놈이 무슨 놈에 옷은 그렇게 비싼걸로 입고 다니냐'
말이 곱게 나 올리 없었다. 마냥 술에 취해 흐트러져 있던 녀석은 의외로 돌아 온 내 퉁명스런 대답에 잠깐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처다 보더니 왼쪽 입꼬리로 슬쩍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마치 전혀 취하지 않은것 처럼 또박 또박
'옷은 좋은걸 사야해'
'어째서?'
'아줌마 여기 500 한 잔 더'
난 고개를 흔들며 일어 섰던 의자에 다시 앉았다.
'옷은 말이야 세상 어떤 물건 보다 어떤 사람보다 나와 가까운거 라구.. 어떤것도 옷 만큼 나와 밀접하게 오랜 시간을 나와 같이 하진 않거든. 게다가 마음에 딱 드는 옷이란건 생각 보다 만나기 여간 어려운게 어닌 법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소중한것을 싸구려를 사봐 비싼것도 그런데 싼것은 더욱더 마음에 들기가 어렵겠지 물론 값이 싼것 중에서도 좋은게 있긴 할 꺼야 하지만 말야 우리는 그렇게 오래 참아가며 주의깊게 뭔가를 고찰할 시간도 능력도 안돼는 미약한 존재 들이란걸 잊으면 안돼 시간이 갈수록 점 점 무뎌지고 지쳐갈 뿐이지 그러다가 정말 괜찮은 옷을 만나더라도 그냥 넘어가 버릴수도 있단 말야
그뿐이 아냐 그렇게 많은 난관을 거치고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을 만났다 하더라도 값이 싼 경우에는 그 옷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워. 몇번만 입고 나면 처음에 그렇게 나를 사로 잡았던 우아한 색도 바래고 깔끔하게 여며지던 넥라인도 늘어져 버리지 하지만 더 비극적인건 그렇게 변해 버렸는데도 불과 하고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거야. 내 몸에 그렇게 오래 그렇게 가깝게 붙어 다니다 보면 설명하기 힘든 깊은 감정이 생기게 되거든. 이미 변해 버렸지만 버리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잊어 버릴때까지 옷장에서 이리 저리 치이다가 결국에는 버려지는거야
서로에게 있어서 가장 잔인하고 힘든 이별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말야 옷은 좋은걸로 내가 살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가장 좋은걸로 사야 하는거야'
친구의 개똥철학과 함께 밤은 자꾸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