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산다.
물론 널리고 널린게 동명이인이긴 하지만, 일부러 모두 똑같은 이름으로 짓지는 않는다.
이름이란, 누군가를 다른 사람과 구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며, 어떤 사람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렇기에 '나'라는 특정인을 지칭하기 위해선 나만의 고유한 이름이 필요하다.
누군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라고 물었을 때,
아무도 '그 사람은 눈두개 귀두개 코하나 입하나 달렸고 팔다리도 두개씩 달렸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은 인간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그 사람의 개성個性, 즉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성을 묻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같은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정체성이란 다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몇년 전인가 온라인에서 지나가는 말로 그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딴죽을 걸었다. 정체성은 다름이 아니라 같음에서 나오는 거라고.
나는 한국 사람이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직장을 다니고, 어떤 가족이고 등등.
그 사람이 소속된 집단의 동질감에서 정체성이 나온다는 이야기.
별로 대단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철저하게 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그 이전까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고방식이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여전히 나를 설명하는 정체성의 대부분은 다름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그런 다름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집단적 동질성만이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던 그 사람의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유의미한 다름이 있다면 유의미한 같음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데, 돌맹이도 모두 다르게 생겼다. 세상에 똑같은 돌맹이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런 다름은 우리에게 있어 무의미하다.
독특한 형상을 한 극소수의 돌은 수석가들에게 수집되어 이름 붙여지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돌들의, 가지각색인 저마다의 다름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은 우리처럼 독자적, 개별적 존재자도 아니고,
따라서 돌맹이의 다름을 일일이 구분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지만..
이게 뭔 소린가 싶으니 조금 달리 이야기 해보면...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쌍둥이도 있고, 도플갱어처럼 똑 닮은 사람도 여럿 존재하긴 하지만,
곰곰히 뜯어보면 조금씩은 다르게 생겼고, 어지간히 닮아서는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쉽게 구분해 낸다.
그런데 우리는 동물들의 얼굴은 쉽게 구분해 내지 못한다.
동물들의 얼굴은 다 똑같다거나,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같은 종의 동물들이라도 자세히 보면 얼굴이 다르게 생겼다.
그걸 알고 의식하면서 봐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과 동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인간끼리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렸을때 흑인들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넬슨 만델라와 모건 프리먼을, 말콤 엑스와 덴젤 워싱턴을 너무나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어렸을 땐 흑인 배우의 얼굴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보였고, 인상이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물론 그 땐 흑인 배우의 비중도 적었고 한국사회에서 흑인을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낯설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요점은 이런거다.
개개인의 다름, 독특한 개성은 서로의 같음과 동질성을 배경으로 할 때 더 두드러져 보이고 잘 이해된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존재방식을 인정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기 위해서 서로의 같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단적 동질성을 강조할수록, 내집단끼리 뭉치고 외집단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집단과 소속으로 대상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서로 공존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로의 같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다름의 배경이 될 공통의 전제를 찾는 것이지,
너와 내가 동질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