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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쿠빌라이칸 황제는 최초의 그랜드 라마 를 만들었고,
이 그랜드 라마는 다른 라마를 관리하였다.
이는 마치 교황이 주교의 관계와 같다.
수 백년 뒤에 중국의 황제는 티베트에 군대를 보내 그랜드 라마를 지지하였는데,
이때 그랜드 라마는 25세의 청년으로 스스로 달라이 라마
즉 티벳의 지배자 라고 참칭하였다.
* 달라이 라마 : 큰 라마 (달라이 : 큰 바다 라는 뜻)
한마디로 달라이 라마는 원래 중국이 만든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달라이 라마는 자신에게 속하지도 않았던 불교사찰을 압수하였고,
그의 주장과 충돌하는 불교서적을 없애버리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두 번째 달라이 라마는 주색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여자와 즐겼으며, 친구들과 파티를 열었고,
이런 작태는 부활한 신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행동으로 그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제거되었다.
170년 동안 신이라고 인정 받았음에도 5명의 달라이 라마가 살해되었다.
5. 지주와 승려들만을 위한 샹그리라(Shangri-La)
종교는 폭력뿐 아니라 경제적 착취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사실 경제적 착취는 종종 폭력을 필요로 한다.
티벳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이 라마가 티벳을 지배했던
1959년까지 대부분의 티벳 농토에서는 노예들이 일하고 있었다.
티벳의 구질서를 감싸돌던 작가들도 불교사찰은 엄청난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말한다.
라마승려들은 엄청난 돈으로 무역과 사업, 사채놀이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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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의 드래풍(Drepung) 사찰은 세계에서 가장 큰 땅부자 중 하나이다.
무려 185개의 영지와 2만 5천명의 노예, 300개의 거대한 목장과
1만 6천명의 목동을 부리고 있을 정도였다.
사찰의 재산은 대부분 보다 높은 계급의 라마승려에게 집중되었으며
그들 다수는 귀족의 자식들이었다.
세속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티벳 군사령관은 무려 4천킬로미터의 땅과 3천 5백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달라이 라마 내각의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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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티벳 추종자들은 중국점령전의 티벳은 사람들이 카르마(karma) 를
스스로 잘 지켜서 경찰이 전혀 필요 없는 나라였다고 잘못 알고 있다.
* karma :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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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티벳에는 정규 군대가 있었다.
이 군대는 규모가 적지만 땅 지주의 명령을 지키고, 도망간 노예를 잡는 일을 하였다.
어린 티베트의 소년들은 대게 부모로부터 떼어져 사원에서 승려로 길러진다.
그곳에 한번만 가면 그들은 일생 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 티벳승려였던 타시 세링(Tashi-Tsering)은
농부의 아이들이 사원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일은 흔했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9살부터 강간을 당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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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찰은 가난에 찌들린 농사꾼의 아이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평생 동안 집안의 노예나 춤꾼, 사병으로 일하게 한다.
과거 티벳에서 자유롭게 농사짓고 사는 농부의 수는 적었다.
대략 1만 명 정도가 중산계급이었는데 그들은 장사꾼, 가계주인 그리고 조그만 무역상들이었다.
나머지 수천명은 거지들이었다.
그 중 소수는 노예들이었는데 대게 가정집 노예였고, 아무런 재산도 없었다.
그들이 낳은 자녀들도 자연히 노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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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만명의 시골인구중 70만명이 농노였다.
이들 농노들은 사실상 노예였다.
농노는 학교교육은 물론 병원혜택도 일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높은 계급인 라마 스님과 귀족의 땅에서 일하며 일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지배자들은 어떤 곡식을 재배 할 것인가, 어떤 동물을 사육할 것인가에
대해서 직접 지시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영주나 라마 스님의 허락 없이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족과 손쉽게 분리되어 다른 먼 지방에 강제로 보내져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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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농노였던 22살의 젊은 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쁜 여자 농노는 대게 주인이 가지고 가정부나 주인이 마음대로 부려먹어요”.
그녀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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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는 어디로 가든지 허락을 받아야 했다.
땅의 소유주는 도망치려는 농노들을 잡을 법적 권리가 있었다.
도망친 24세의 한 농노는 중국의 티벳 침공을 “해방” 이라며 환영 할 정도였다.
그는 농노들은 끊임없는 고통과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한다.
그가 탈출에 3번째 실패하였을 때 그는 주인의 하인들로부터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올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그들은 그의 상처에 알코올과 부식소다를 쏟아 부어 고통을 더 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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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들은 주인의 땅이나 사찰의 땅에서 아무런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주인의 집을 고치거나 곡식을 운반하거나 장작나무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운반용 가축이나 운송수단을 제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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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혼할 때 세금을 내야 했고, 아이가 태어날 때 그리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죽을 때도 세금을 내야 했다.
그들은 마당에 나무를 심을 때도 세금을 내야 했고, 가축을 기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종교행사, 노래, 춤, 북치기, 심지어 종을 울릴 때도 세금을 내야 했다.
감옥을 갈 때도 세금을 내고 풀려날 때도 세금을 냈다.
실업자가 되었을 때도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른 마을에 갈 때에도 통행세를 내야 했다.
사람들이 그런 세금을 낼수 없을때는 티벳사찰은 20%에서 최고 50%의 엄청난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그래서 어떤 빚은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전수되었다.
빚을 갚지 못하면 평생 노예신세를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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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는 계급질서를 강화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난이 전생에서 사악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따라서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나의 업보라고 생각했고,
다시 태어나면 자신들의 운명이 더 좋아진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부자와 힘있는 권력자들은 그들의 행운을 과거의 덕행에 의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던 티벳 에서는 도망친 농노와 도둑들에게
눈알 후벼 파내기, 혀 뽑기, 근육 자르기, 사지절단 등의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1960년대 티벳을 여행한 스튜어트와 겔더는 한때 농노였던 왕 퉤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사원에서 양 2마리를 훔쳤었다.
이 일로 그의 두 눈은 완전히 뽑혀져 나갔고, 손은 절단되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 라마가 제 눈을 뽑아버린 순간 저는 불교에서 어떤 좋은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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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불교의 가르침과 반대되지만,
이들 범죄자들은 심하게 두들겨 맞고, 티벳의 추운밤의 야외에서 내팽겨쳐 얼어 죽는다.
이것을 신에게 맡긴다고 말한다.
톰 그룬필드(Tom Grunfeld) 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티벳과 중세 암흑기의 유럽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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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안나 루이스(Anna Louise Strong)는
티베트 권력자들이 사용한 고문기구 전시회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모든 사이즈의 수갑이 있었는데, 어린이용도 있었다.
그리고 코와 귀를 자르는 기구, 눈을 파내는 기구, 손목을 자르는 도구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릎과 종아리, 다리를 잘게 자르는 도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불로 도장을 지지는 기계, 채찍 심지어 내장을 파내는 특이한 기구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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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회에서는 절도죄로 눈이 뽑혀져 나갔거나 불구가 되어 고통 받는
사진과 증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주인이 그 돈을 갚지 않아 주인의 소를 훔친 목동이 있었다.
이 일로 그의 손은 잘려나갔다.
자신의 아내를 주인에게 바치기를 거부했던 목동도 역시 손이 잘려나갔다.
코와 입술이 잘린 공산주의자의 사진, 강간당하고 코가 잘린 여자의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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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티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주로 불교독재를 이야기 했다.
1895년 티벳을 방문했던 영국인 웨델(A. L. Waddell)은
티베트 승려들은 서민들에게 혹독한 독재권력을 휘둘렀고
그 승려들이 불어넣은 악마적인 미신은 사람들을 위협했다고 썼다.
1904년 퍼시발 랜든은 달라이 라마를 '폭압의 원동력'이라고 묘사했다.
그 당시 또다른 영국인 여행자 오코너(O'Connor) 는
티베트의 지주와 승려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어떤 항소도 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일반 사람들은 사찰과 승려들의 계략을 통해 억압 당했다.
티베트 지도자들은 유치한 전설을 조작해, 사람들에게 미신을 불어넣었다.
1937년에 방문했던 스펜서 채프먼(Spencer Chapman)은
라마 스님들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거나 교육하는 일들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티베트 스님들은 길가에 버려진 거지들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티베트에서 지식은 불교사찰의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철저히 조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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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반항
1951년 중국공산당은 티벳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선언하였다.
1951년에 맺어진 조약은 달라이 라마의 형식상의 자치를 인정하였으나 군사와 외교는 중국공산당에 넘어갔다.
중국은 사회개혁을 위한 티벳의 내부관리를 허가하였다.
중국은 처음에는 천천히 변화를 위한 설득작업을 주로 하였다.
그 가운데 중국이 실시한 최초의 개혁은
당시의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를 삭감하였고, 병원과 도로 건설이었다.
한 목격자는 서양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중국정부는 티벳의 문화와 종교를 보호하였다고 기술했다.
귀족이나 사찰의 재산은 압수되지 않았고, 귀족, 승려들은 계속 농민들을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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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지도자들과 라마승려들은 수백년동안 중국인들의 왕래를 보아왔고,
장개석의 국민당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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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민당 정부의 지지에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의 결정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어린 달라이라마가 라사 지역에서 탄생되었을 때, 중국군대가 그를 호위하였고,
중국의 장관까지 참석하였다. 이것은 수백년동안 내려온 전통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때 티베트의 지도자들과 라마승려들이 참을수없던 점은 당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 귀족들과 라마승려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티벳 에서 평등주의적 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1956년부터 1년동안 무장한 티벳 특공대는 중국인민해방군을 기습하기도 하였다.
이런 공격은 미국 CIA의 폭넓은 지원을 받았다.
이 지원에는 군사훈련, 네팔군사기지 그리고 수많은 공수지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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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미국 CIA 의 아시아해방국은 열정적으로 티벳의 독립명문을 공표하였고,
이는 달라이 라마의 장난 투탄 노부(Thubtan Norbu) 와 함께 하였다.
그는 이 CIA 지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두번째 아들 기알로 통굽(Gyalo Thondup)은
1951년에 CIA 와 함께 움직이는 정보기관을 창설하였다.
이후 그는 이 조직을 CIA 산하의 게릴라로 개조시켜 조직원들이 티벳에 낙하산 침투를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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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가 티벳에 뿌린 많은 티벳 특공대와 조직들은 귀족일당의 지도자나 지도자의 아들이었다.
그들 중 90 퍼센트는 낙하산 침투 이후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CIA 에 의하면 그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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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이 딘(Hugh Deane) 은 엘리트계급의 많은 라마승이나 조직원들은
중국 인민군에 대한 저항에 가담하였으나 일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이런 저항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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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 관한 책에서 긴스버그(Ginsburg)와 매소스(Mathos) 는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 확실한 것은 라사와 인근지역의 대다수 서민들은 중국에 대항하는 데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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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저항은 모두 붕괴되어버렸다.
공산주의가 들어가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1959년 이후부터
노예제도와 돈을 받지 못하는 농노제도는 없어졌고
채찍질, 사지 절단 등의 극단적인 처벌도 사라졌다는 점이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살인적인 세금제도를 없애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실업자들과 거지를 크게 줄였다.
또한 그들은 일반 교육을 실시하고, 사찰이 독점했던 교육을 없앴다.
그리고 라사 지역에 하수도와 전기시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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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하러는 티벳에서의 경험을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헐리우드에서는 이를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 티벳에서의 7년, 하인리히 하러역은 브래드 피트)
이후 히틀러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었던 이 하인리히 조차 중국에 반항했던 티베트인들은 주로 귀족, 라마 승려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귀족과 라마승들은 도로나 다리에서 노동하는 잡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관광객을 위해 도시 청소를 하게 되어 더욱 자존심을 구겼다.
이때부터 그들은 원래 거지나 부랑자들을 위한 합숙시설에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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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중국은 귀족과 라마승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압수하고
농민들을 수 백 개의 자치구역으로 재조직하였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수십만 에크르에 이르는 이 땅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귀족이 가지고 있던 가축들도 가난한 양치기들의 집단농장으로 보내졌다.
가축사육이 개선되었고 다양한 야채와 새로운 품종의 밀과 보리가 도입되었다.
배수시설도 좋아졌다. 자연히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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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농민들은 여전히 종교적이었는데,
그들은 귀족에서 이제 잡부가 되어버린 승려들에게 구호품을 주기도 했다.
어린아이시절부터 사찰의 명령으로 강제로 끌려왔던 수많은 승려들은 승려생활을 그만둘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는데 곧 수 천명이 승려생활을 그만두었다.
특히 젊은 승려들일수록 승려생활을 쉽게 그만두었다.
나머지 승려들은 정부에서 지급한 약간의 배당금으로 살아 가며 종교행사와
결혼식, 장례식에서 일을 보아주고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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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막내동생이자 조언자였던
텐진 체갈은 중국이 120만명의 티벳사람들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침략 6년 뒤인 1953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티벳의 인구는 127만 4천명이었다.
다른 조사에서도 티벳의 인구는 약 2백만명은 되었다.
만약 중국이 1960년 초기에 티벳인 120만명을 죽였다면 티벳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어야 하고,
티벳 땅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는 없다.
티벳 공격을 맡은 중국군대는 매우 적은 규모였으며,
심지어 다른 일을 안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만 한다 해도 많이 부족한 숫자였다.
중국정부는 특히 1966년과 1976년 사이의 문화혁명 동안의 실수를 인정했다.
이 기간 동안 종교탄압이 중국과 티벳 에서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난 폭동 이후 수천 명의 티벳인들이 감옥에 투옥되었다.
대약진 기간 동안 강제 집산화와 곡물재배가 농민들에게 부과되었고,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중국은 티벳에 대한 통제를 다소 느슨하게 했고,
이전 20년동안의 피해를 원상태로 회복시키려 노력하였다.
34
1980년 중국정부는 티벳에 더욱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지금 티벳인들은 개인적으로 땅을 가질 수 있으며, 남는 수확물을 팔 수도 있고,
어떤 곡식을 재배하고 어떤 가축을 기를 것인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외부세계와의 소통도 허용되었고, 국경 통제가 완화되어
인도와 네팔에 망명한 친척을 만나는 일도 가능했다.
35
중국의 거대한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한족은 1990년대에 이르러 티벳을 비롯한
서부지역으로 많이 이동하였다.
라사와 쉬갓세 거리에서 중국인들의 숫자가 이미 다른 민족보다 많았다.
중국인들은 공장을 돌리고 가게와 판매대를 많이 설치하였다.
하수시설과 주택에 사용했으면 더 좋았을 돈을 높은 빌딩과 커다란 쇼핑센터를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의 관료들은 이웃 티벳 사람들을 뒤쳐진 게으름뱅이로 취급했고,
경제발전과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90년대에 이르러 국가주의자들의 동정을 샀던 티벳출신 공무원들이 해고되었고,
달라이 라마를 비방하는 중국의 선전이 시작되었다.
티벳인들은 분리주의 저항과 정치적 전복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체포,구금 당하기
일쑤였다.
체포 당한 사람들은 음식과 물, 이불이 부족한 상태로 구금을 당했고,
협박과 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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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티벳의 가정에 3자녀 제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만약 부부가 3명 이상 아이를 갖게 될 경우 그 초과된 아이는
부양, 의료,교육,주택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이런 처벌은 일관성 없이 추진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티벳의 역사, 문화 그리고 종교는 학교교육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티벳어로 된 교육교재들도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37. 엘리트, 망명자 그리고 CIA
티벳의 귀족과 승려들에게 공산주의자의 간섭은 대재앙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달라이라마 자신도 역시 도망쳤는데 CIA가 그의 비행자금을 대주었다.
이들 티벳 계급은 그들이 먹고 살기위해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1998년 미국 국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60년대에 티벳망명정부가
CIA에서 비밀리에 받은 돈은 일년에 170만 달러(약 20억원) 라고 한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달라이 라마의 내부조직은 공식성명을 내고
자신들이 1960년대에 미국 CIA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받았고,
이 돈을 중국의 공산당혁명을 방해하는 티벳게릴라군에게 보냈다고 고백했다.
달라이 라마가 CIA 에서 받는 연봉은 18만 6천 달러이다 (약 2억 4천만원)
인도 정보기관 역시 달라이 라마와 티벳 망명자들에게 돈을 대주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그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CIA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 답변을
거부했으며 CIA 역시 언급을 거부했다.
38
1995년 노스 캐롤라이나의 뉴스 앤 옵스브지(News & Observer) 는 달라이 라마와 보수 강경파 공화당 상원위원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사진을 전면에 개재했다.
그 사진 밑의 타이틀은 “불교도가 종교적인 정의의 영웅을 사로잡다” 였다.
39
1999년 4월 마가렛 대처와 요한 바오로 2세 그리고 조지부시, 달라이 라마는 영국정부에게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피노체트는 파시스트였고 CIA 가 그가 영국을 방문할 때 체포했던 사람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피노체트가 반인류범죄로 심판을 받기 위해 스페인에 가지 않도록 촉구했다.
오늘날까지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국 의회는 매년 2백만달러를
인도의 티벳망명 정부에 제공하고 있으며 추가로 수 백만 달러가 티벳망명 정부내의 소위 ‘민주주의 활동’을 위해 지원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조지 소로스 에게 돈을 받기도 했다.
*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 국제 금융 투기꾼
(한국,태국,말레이시아 IMF 관리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 중 한 사람)
40
문화에 대한 의문점
우리는 달라이라마가 티벳을 지배할 때, 사람들이 사찰과 지주들과 함께 만족스럽게 살았으며 인간적이고 평화적인 가르침으로 매우 정신적이며,
비폭력적인 사회에서 살았다고 들어왔다.
티벳의 불교문화는 부자인 라마승려와 가난한 농민들을 서로 연결하는 진통제였다.
티벳 승려들은 이를 샹그리라 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중세유럽의 암흑시대는 소작농부들이 주인의 지배아래 교회가
깊은 영적 유대관계에 만족했던 시대로 보였던 것이다.
41
또 다시 우리는 하나의 특정한 문화를 이 자체의 고유한 용어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그 문화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누리는 최상류층이 표현한 문화이다.
역사적으로 티벳 샹그리라는 중세유럽의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닮은 점이 없다.
한편 문화는 수많은 부정과 다수의 커다란 희생을 통한 소수의 특권을 합리화할 수 있다.
티벳 종교지배에서 지배층은 그들의 재산과 권력을 강화하는데 전통문화를 이용하였다.
종교지배는 치유하기 힘든 사고와 행동과 사악한 영향력의 방정식이다.
이것은 지배층의 우월성과 소작농부의 쓸모 없음을 선전하였다.
부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한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도 그들의 비참한 삶에 걸맞는 존재라고 하였다.
업보에 관한 모든 가르침은 우리의 행복한 삶과 그리고 고난이 전생의 결과이며,
이 모두는 신의 의지에서 나온다는 말로 조작되었다.
현대 세속사회의 시민들은 보다 종교적인 사회의 특징인 행복과 고통,
만족과 관습의 방정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는 옳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사람이 왜 그러한 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문화적으로 포장해도 눈을 파내는 일은 눈을 파내는 일이고,
손발을 자르는 것은 자르는 것이다. 노예착취는 사악한 일이다.
정신적인 유대와 육체적인 속박은 엄연히 다르다.
이 둘이 함께 공존하더라도 말이다.
많은 일반 티벳사람들은 달라이라마가 티벳에 돌아오길 원한다.
그러나 그들 중 달라이 라마가 원하는 식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99년 워싱턴포스트지에서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티벳에서 계속 숭배될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957년 그와 함께 도망쳤던 부패한 귀족패거리와 함께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티벳 농부들은 중국의 토지개혁 당시에 얻었던 그들의 땅을 귀족일당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다. 한때 노예였던 사람들 역시 그들의 주인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한때 노예였던 67세의 왕축(Wangchuk) 은 말한다.
그는 자신도 달라이 라마를 숭배했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저도 한때 달라이라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살았었습니다.
물론 중국공산주의에서 자유롭게 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노예 였을 때보다는 지금이 더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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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에서 불교승려와 함께 치료법을 공부했던 킴 루이스(Kim Lewis)는
티벳사원에서 살았던 12명의 여자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루이스가 그녀들에게 다시 티벳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라고 물었을 때
그녀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처음에 루이스는 중국공산당의 지배가 싫어서 그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녀들의 대답은 달랐다.
오히려 그녀들은 티벳에서 4, 5명의 남자와 결혼해야 하고 평생 계속 임신 하거나 바람난 남편에게 성병을 옮아 고통을 당하는 일을 겪지 않는 지금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 젊은 여자들은 교육을 받고, 종교와 전혀 관계없는 일을 원했으며,
왜 이렇게 미국인들이 순진한지 궁금해했다.
그들은 그의 할머니가 승려에게 고통을 당하던 이야기를 말했다.
티벳 승려들은 그녀의 할머니들을 “지혜의 위안부”(섹스 도구) 로 삼았으며
그들은 당시 젊은 여성이었던 할머니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우리는 너희들을 이용해서 도를 닦는 거야.
그것이 너희들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느냐?
부처는 여자와 함께 지내야 깨달음을 얻는 거지”
루이스가 인터뷰한 여자들은 특히 자신들의 어린 자녀를 사찰에서 빼앗아 가는 데에 몹시 분통을 터트렸다.
아이가 엄마를 찾고 울부짖을 때, 승려들은
“왜 엄마 때문에 우는 거야. 엄마는 널 포기했어. 엄마는 여자일 뿐이야 ”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동성연애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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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티벳 불교 몇가지
서양인들은 흔히 티벳 불교를 “라마교’ 라 부른다.
사실 라마교라는 말은 티벳사람들이 비난할 때 쓴다.
19세기말 영국과 러시아는 티벳을 자신들의 제국에 병합시키려고 했다.
유럽인들은 식민지를 문화적으로 결함이 있어 자신들이 구제해주어야 하는 곳으로
조작 묘사하여 자신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합리화 하였다.
따라서 티벳은 타락하고 사악한 성직자들의 압박에서 시달리는 미신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불합리한 곳으로 묘사되었다.
서양인들은 티벳 불교는 진짜 불교가 아니며, 불교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대신 그들은 티베트의 불교를 ‘라마교’라고 불렀다.
서양의 학자들은 불교를 이성과 절제 그리고 깊은 철학과 인습의 규제로부터의 해방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그런 순수한 불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다만 유럽과 미국의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티벳이 신비의 땅이라 불리게 된 것은
유럽의 식민지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어떤 사람이 실종되었을 경우 그 사람은 티벳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티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었다.
신학협회의 창시자 블라바츠키(Blavatsky) 부인은 고대의 아틀란티스의 지혜를 보존하고 있던 성자 마하트마가 티벳에 살았었다고 말했다.
추리소설에서도 셜록 홈즈 시리즈가 다시 부활할 때 홈즈는 티벳에서 2년을 보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탐험가 시제르손( Sigerson)의 티벳 탐험기를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가 알던 티벳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티벳은 비폭력적인 사회가 결코 아니었다.
심지어 1642년 달라이 라마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비폭력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5대 달라이라마는 그 자신의 몽골친위부대를 동원하여 권력을 장악했으며
자신의 라이벌 을 제거했다.
티벳 군대는 1681년 라다크, 1720년 몽골과도 전쟁을 벌였다.
18세기에는 부탄을 수도없이 공격했다.
티벳 군대는 1788년과 1792년 동안에 네팔을 , 1854년 도그라를 ,
1842년 카시미르에서 라다크를 침공하였다.
1904년에는 심지어 영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9대, 11대, 12대 달라이 라마는 모두 어릴 때 죽었는데,
모두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그 자신의 측근에 의해 암살될뻔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많은 티베트 승려들은 1950년 중국의 침입에 맞서 용감하게 전투를 벌였다.
/ by Donald S. Lopez Jr
(author of Prisoners of Shangri-La: Tibetan Buddhism and the West)
P.S
7 Things You Didn't Know about Tibet 에서 주요 내용을 간추려 번역했다.
친중국적인 글이 아니냐라는 반론이 있는데, 그보다는 중국의 잘못도 있지만, 티베트 자체의 환상을 거두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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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티벳에 대한 아시아 전문가 박노자교수님의 글입니다....
티베트, 악마에서 천사로
[한겨레21 2004-07-01 05:16]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서구인들이 ‘진리의 낙토’로 찬양하는 땅… 왜 그들의 감화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년 전 필자는 한 미국인 학자와 함께 한국 사찰들을 순례한 적이 있었다. 한국이든 중국·일본·베트남이든 후한 점수를 주려 하지 않았던 그 학자의 비판적인 동아시아관에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티베트였다. 한국 불교 지도층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했던 그 학자에게 티베트 불교의 지도부는 ‘성인’(聖人)으로 보이고, 한국 선맥(禪脈)에서의 사자전승(師子傳承·사찰에서 스승과 제자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 계보들에 대해 의심함에도,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 세력인 겔룩파(Gelukpa·格魯派)의 주장은 그대로 긍정했다.
유럽에게 티베트는 왜 예외인가 그 학자의 티베트관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티베트의 종교·독립 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으로 생각했지만, 유럽에서 살게 된 뒤 학술적 차원이든 대중문화의 차원이든 ‘티베트’라는 존재가 많은 유럽인들에게 기타 비서구 지역들과 정반대로 의식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술적인 차원에서 서방에서의 이슬람 문화권 연구의 묵시적인 전제는 “우리와 달리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테제이고, 한국학 연구에서는 성리학적 보수성, 공(公)적 공간의 불충분함, 노비제 등이 조명되는 등 비서구에 대한 비하론적 서술의 전통은 그대로 계승된다.
그런데 티베트에 대한 상당수 구미 학자들의 서술은 아예 접근부터가 다르다. 예컨대 미국 불교학계의 원로이고 시사주간지 <타임>이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 중 한명으로 지정한 로버트 투먼(Robert Thurman)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의 최근의 베스트셀러 <내면의 혁명: 생명, 자유, 진정한 행복의 추구>(1999)에서 티베트를 “불교적 통치 아래서 물질에 대한 영(靈)의 승리로서의 진정한 근대성인 내면적인 근대성을 이룬 지구를 구제할 미래형 문명”이라고 부른다.
달라이 라마의 “학술적 대변인” 격인 투먼의 경우야 특별하다고 치더라도,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학자들도 중국이나 네팔 등과 전쟁도 치르고 권부(權府) 내부의 폭력적 파벌 투쟁의 경험도 많은 티베트를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윤리적 사회”로 여기고 있다. 비서구 지역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경멸적이기까지 한 서구 학자들도 이처럼 ‘녹아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대중문화에서 ‘티베트’ 담론은 “진리의 낙토(樂土) 티베트”에 대한 찬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이기적이며 냉정한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실제로 하러는 소신파 파시스트였는데 영화에서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다)가 어린 달라이 라마의 교사이자 친구가 돼서 애타주의와 내면의 평화를 배우고, ‘세계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서구의 문명과 영어를 가르쳐준다. 영화 속의 티베트는 정신적 발전의 별천지로, 1950년 티베트를 침략하여 점령한 중국군은 “마지막 낙원”을 망가뜨리는 악마로 묘사된다. 고급 라마들의 안정된 생활을 받쳐주는 것이 바로 티베트 인구 절반을 차지하던 사찰의 예속 농민이었다는 사실, 농민들이 중세 유럽의 농노처럼 주인에게 가혹한 체형을 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 사찰들이 이자놀이를 벌이는 고리대금업자의 노릇도 겸했다는 기초적인 상식도 반영되지 않았다. 침략 초기에 중국 당국이 달라이 라마 정권을 포섭하여 중앙 정부의 대리인으로 삼으려 한 역사적 사실도 무시당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도서 시장에서 범람하는 각종 ‘자기계발’ ‘정신 발전’ ‘요가와 명상’ 같은 책에서 ‘티베트 라마’는 진리를 깨달은 ‘영적 지도자’로 나타나 숭배를 받는다. 도대체 티베트 라마들은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파격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가? 17~19세기 선교사들은 사악하게 묘사 현재의 현상들을 피상적으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유럽인들이 티베트를 일종의 예외로 대우해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학 강단에서 티베트의 ‘내면적 근대성’이 서구의 ‘외면적 근대성’보다 우월하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그게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이 아닐까? 그런데 유럽인들의 티베트관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티베트를 우러러보는 그 태도의 내면에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과 정책적인 계산들이 내재돼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티베트를 정탐한 17~19세기 가톨릭 선교사들은 사찰의 지옥도(地獄圖)나 공포스러운 모습의 호법신(護法神)들의 그림에 경악해 티베트 불교를 중국 불교보다 더 사악하게 묘사했다. ‘라마교’(Lamaism)라는 비칭이 붙은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 19세기 말 영국 탐험가들은 “신도들의 복종만을 요구하는 정신적 테러리즘”이라고 혹평했으며, 1904년 영국군의 티베트 침략에 종군해 나중에 <라사의 베일 벗기기>란 베스트셀러를 낸 에드문드 챈들러(Edmund Chandler)는 티베트 승려들을 “미신을 수단으로 혹세무민하여 민중에 악정을 베푸는 무리”로 봤다. 그 “미신”이 “지구를 구할 진리”로 탈바꿈한 것은 1920~60년에 이루어졌다.
세계 공황·대전들의 시대에 서구적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서방 지식인들에게는 폭력의 도가니에서 구해줄 ‘이질적이며 신비스러운 존재’가 필요했는데, 신지파(神智派·theosophy)라는 소수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세계의 영적 중심’으로 해석된 바 있던 티베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이슬람권과 달리 유럽과 경쟁한 역사도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 그야말로 ‘경계선 밖의 오지’, ‘우리’에게 저항한 적이 없는 ‘그들’을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지식인들이 신좌파 등 ‘불온 사상’에 빠지기는 걸 방지하려 했던 미국 등지의 주류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도, 1959년부터 망명하여 대중국 독립 투쟁에 나선 관계로 미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달라이 라마가 서구 지성계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보수적 기독교의 기반이 잠식당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같은 ‘동양 스승’인 마오쩌둥이나 호치민보다 낫지 않았겠는가? 또한 무엇보다 티베트는 인도와 중국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망명 중인 티베트 정통 지배자들과 서방 지성계 사이의 두터운 연결고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스러운 미신’은 거의 100만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신앙·애호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그 효과로 티베트에 대한 서방인의 태도는 오리엔탈리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는 게 아니라, 비하 위주의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 대신 낭만적 소비로서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구가 티베트를 보는 프리즘이 된 듯하다. 티베트에 대한 상상은 ‘정체되고 신비스러운 오리엔트’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대상물의 복합성을 무시해버리는 타자에 대한 일차원적 의식의 형태가 원래 그렇듯이 그에는 폭력적인 이면들이 많다. 티베트가 획일적으로 ‘불교의 낙토’로 상상되는 만큼 티베트 토착 종교인 본교 신도들이 몰이해를 당하게 되고,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대표자’로서 위치를 점하는 만큼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지도를 받지 않는 가규파(Kagyupa·?擧派) 등 소수 문중들이 소외당한다. 특정 대상물의 숭배적 신비화는 결국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라는 불교적 가치에 대한 배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티베트 안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 물론 일부 서구인들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감화를 기뻐할 수 있고, 중국과의 협상에서 세계 여론의 카드를 십분 이용해야 할 달라이 라마가 미국 정계와의 어쩔 수 없는 유착도 이해할 일이다. 그럼에도, 티베트 민중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티베트가 단지 구미인의 ‘상상적 이용’의 대상물이자 미 정부의 대중국 정책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티베트도 여느 다른 지역 못지않게 모순으로 찬 계급사회이며 불평등한 위계질서적 관계나 종교집단, 집권 파벌 사이의 갈등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티베트 불교를 존중한다면 티베트 불교의 신비로움을 즐기며 달라이 라마를 숭배하기보다는, 차라리 티베트 불교에서 남녀·승속이 더 평등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죽어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약자들과 희생자들이 불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참고문헌] 1. Donald Lopez, Jr., 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유럽인의 ‘티베트적 상상’의 허망함을 거의 최초로 깨쳐준 한 불교 학자의 저서. 요점 정리: http://www.press.uchicago.edu/Misc/Chicago/493105.html 2. Peter Bishop,, London, 1993. 신지파부터 오늘까지의 ‘티베트숭배’의 역사를 칼 융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파헤친 책.
3. Martin A.Mills,, Routledge, 2003. 라다크 지역의 한 티베트 사찰을 구체적 사례로 승속 사이에서의 역학 관계와 티베트 종교에서 토착적 요소들의 역할을 분석한 책.
4. Michael Parenti, Friendly Feudalism: The Tibet Myth,http://www.michaelparenti.org/Tibet.html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티베트 사회 정치사를 분석하여 ‘비폭력적 윤리적 사회’의 신화를 공격하는 논쟁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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