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8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몇십년 어린 저에게도 꼬박꼬박 애기씨라며
두손을 모으고 대하셨지요.
물론 저희집안에서도 머슴할아버지를 존대했습니다.
머슴 할아버지라는 별명은
자신의 친구분께서 지어주셨지요.
저희는 그렇게 부르지 않고
항상 교수님 이라며 경칭을 붙여드렸었습니다.
일제시대 그 분은 저희 할아버지의 학동(주인의 아들이 공부하는데
같이 공부하고 놀아주는 하인)으로 저희 집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두 분은 동갑이셨구요.
유난히 총명하셨던 머슴할아버지를 눈여겨 보셨던
저희 증조부께서는 할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가실때
머슴 할아버지를 함께 딸려보내셨습니다,
물론 학비, 생활비를 다 저희집안에서 부담했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조선인에게는 동경대는 매우 드문 기회고
교토대학교에서 함께 공부를 하며
머슴 할아버지는 저희 할아버지를 챙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할아버지는
그만 학교를 그만두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셨습니다.
집안 어르신들 말로는 그 시절 할아버지는
김일성 등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과
중국 화북지방의 민족주의 계열의 연락책을 맡으시며
활동을 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상세한 내역은 잘 모르나
할아버지께서는 테러 중심의 임시정부는 별로 지지하지 않으셨고
중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을 모아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도중에 머슴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공부를 하셨고
증조부께서도 학비를 대주셨다고 합니다.
드디어 광복이 되고
저희 할아버지와 머슴할아버지는 국내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저희 할아버지는 좌익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이승만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집안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제시절 집안의 남자들은 불령선인과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다 당하고 돌아가셨고
집안에는 여자들 뿐이었고 고추달린 남자들이라곤 어린 애들 뿐이었죠.
한국전쟁때도 이리저리 피난다니면서
혹여 국군에게 총을 맞고 죽을까
대구까지 쫒겨 내려왔습니다.
그때 머슴할아버지는 경북대학교서 교수로 재직중이었고
저희 가족은 의탁할 곳이 생겼습니다.
친적분 말씀으로는 저희가 거의 거지꼴을 하고
대구 시지까지 내려오자 머슴할아버지는
맨발로 뛰쳐나와 저희 할머니를 보시고는
마님께서 어찌 이런 고역을 치르십니까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머슴할아버지는
당시 얼마 되지도 않던 교수월급을 쪼개서 저희 집안을 도와주셨고
저희 셋째삼촌 대학 등록금까지 대 주셨죠.
셋째삼촌은 경북대 학생이었는데
당시 박정희, 전두환 정권때 민주화 시위를 할때
머슴 할아버지께서 감옥에 갇힌 셋째삼촌의 신원보증인을 하면서
다시 집으로 데러오시곤 하셨죠.
둘째삼촌은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하셨는데
경북대 교수셨던 머슴 할아버지는 매번 재판때 마다
변호사 친구에게 무료 변론을 부탁하셔서
그나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죠.
장남이신 저희 아버지께 머슴할아버지는 매번
큰 도련님께서는 집안의 기둥이시니
두 분 작은 도련님처럼 고난의 길을 가지 마시고
집안을 생각하시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나,
머슴 할아버지는
저희 집안의 중매까지 서주셨어요.
속된 얘기일수도 있겠지만
저희 사촌 누나들
전부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집안에 시집을 갔어요.
다 머슴할아버지께서
이래저래 배려해 주신 덕분이에요.
그리고 저희세대 남자들에게는
나이가 30인데도
애기씨들은 집안의 명운을 짊어지셨으니
오직 배움에 힘쓰셔야 한다고 하셔서
끊임없이 가르쳐주셨죠.
저희 사촌형에게는 머슴할아버지가 은사님 이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저희 세대까지도
챙기신 후 머슴할아버지께서 어제 돌아가셨네요.
솔직히 제가 어렸을때는 머슴할아버지의 아드림과 손자녀들은
저희 집안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대학교수 아들딸들 이니
그들도 의사, 판검사, 대학교수가 되어있고
그 손자들도 대학생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왔으니
저희같은 기초생활수급자를 상전(?)으로 모시는게 싫었겠죠.
지금은 잘 지냅니다.
장인어른의 부친이신데 잘 모셔야지요.
그 집 막내아들의 막내딸이 제 아내입니다.
25살때 대학졸업하자마자 저에게 시집을 왔는데
어린시절부터 가깝게 지냈었죠.
아내의 말이 자기는 할아버지가 왜 어린 오빠를 애기씨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됐다는 군요,
할아버지의 출상을 마치고
슬픔에 잠든 아내를
제 품에서 재우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머슴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