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흰돌이, 흰순이라는 유기견의 입양으로 제 삶에 정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유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우리집 강아지들인 흰돌이, 흰순이, 럭키, 순심이, 레오를 소개드린 적은 있지만 오늘은 또 다른 소감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왼쪽부터 단골 중국집에서 탕슉을 기다리는 럭키, 흰순이, 흰돌이, 순심이.
오늘 주말이라서 그런지 문득 옛 생각이 나더라구요. 4년 전 이맘 때에 저는 무척 힘든 일을 겪었습니다. 저의 정신적 지주이자 등불과도 같았던 부모님을 한 달 간격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아버님은 폐암 말기여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는데, 저와 함께 아버님을 교대 간병하던 어머님이 감작스런 화재사고로 돌아가시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때의 그 충격이란 뭐라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당시 건대 병원에서 아버님의 간병을 하던 중 동생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보니 골목에 소방차 사이렌이 계속 울리고 집앞은 흠뻑 젖어있고 너무 놀라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소방관분이 제지를 하면서 "들어가지 않으시는게 좋겠습니다. 어머님은 저희가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말을 하더군요.
잠시 후 구급차용 운반대 위에 흰 천에 쌓인 어머님의 시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인 어머님의 죽음에 넋을 잃은 채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어요. 하지만 그 울음도 길게 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을 건대병원 영안실로 모시고, 또 아버님을 뵈러 가야했기 때문이었어요.
어머님의 갑작스런 죽음도 충격적인데 그 때까지는 의식이 살아있던 아버님께는 또 어떻게 말을 해야하나라는 생각에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님이 화재사고로 돌아가신 것을 모릅니다. 다음날 당연히 저와 교대로 간병을 해야할 어머니였기에 어떤 이유라도 말씀을 드려야 했어요. 화재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면 아버님께서 너무 큰 충격을 받을까봐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넘어져서 돌아가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딱 한 달 째 되는 날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때가 바로 4년 전 이맘 때네요.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룬 지 한 달 만에 다시 아버님의 장레식을 치뤘습니다. 물론 나이드신 어른들은 돌아가시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한 달 사이에 부모님을 차례대로 장례식을 치룬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돌아가신 아버님은 화장을 하고 난 후에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 곁에 사이좋게 나란히 수목장으로 모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후 할 수 있는 많은 예법이 있지만 수목장으로 모신 것은 참 잘 한 일인 것 같습니다. 마치 공원처럼 꾸며진 그곳에는 지금도 가끔 가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너무 슬프지 않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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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그렇게 한 달 간격으로 떠나보내고 저는 그 슬픔에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간은 매일 폭음만 하고 지냈어요. 제가 늘 단골로 가는 구의역 부근에 주점이 있는데 그 주점에 실장님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장례식을 다 치루고 형제들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위로를 해주던 친구선후배들도 매일 저를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어느 때에는 그 주점에서 엉엉 운적도 있었습니다. 괜히 너무 서럽고,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망가져가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님들도 원하는 것은 아닐거야. 힘을 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먹고 제주도에 2박 3일 다녀왔어요. 그 때는 아직 초봄이라 한라산에 중턱 이후로는 눈이 녹지 않을 때였는데 그냥 아이젠도 없이 맨 운동화로 한라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기도 했어요.
다음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오후에 공항에서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제주도의 올레길을 8시간 정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걷고 또 걷다보니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졌어요. 그 때 걸었던 제주도의 올레길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아직 올레길을 걷지 못한 분들께는 꼭 추천해주고 싶어요. 이 세상 온갖 시름 다 잊고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더 아름다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어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게 제주도를 다녀와서 이제 밤마다 폭음을 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했던 일이 야간 쇼핑이었습니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혼자사는 남자가 집에 살 것이 뭐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도 그냥 매일 건대 앞에 있는 이마트에 쇼핑을 하러 다녔습니다. 왕복 1시간 정도 걸리는 그 거리를 그냥 하릴없이 걷고 또 걸어서 2 ~3시간쯤 배회하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어떤 날은 간장 한 병 사갖고 들어오고, 어떤 날은 맛소금 한 봉지 사오고, 어떤 날은 다시다 한 봉지 사오기도 하고.. 그렇게 며칠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이마트의 한 쪽에서 '몰리 하우스'라는 애완견샵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예전에도 늘 다니던 이마트였는데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곳이 그 때 보인 거였어요. 그곳에는 너무도 예쁜 강아지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저는 품종견 아이들이라곤 옆집에서 키웠던 치와와 정도 밖에 몰랐어요. 말티즈, 시츄, 푸들, 닥스훈트...... 이런 이름조차 생소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강아지를 좋아했던 저는 그 때 그 샵에 있던 강아지를 보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데리고 와서 키우면 내가 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내 마음이 조금 달래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허전한 마음을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을 그런 존재였던 강아지에게 의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카드를 꺼내어 거기 있던 예쁘게 생긴 말티즈 강아지 한 마리를 결재를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강아지를 집에 데리고 가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돌봐줘야 할텐데, 내가 지금 이렇게 즉흥적으로 구매를 해서 내일 아침에 혹시 후회하지 않을까? 이 강아지는 마음만 먹으면 내일도 와서 사갈 수 있으니 오늘은 집에가서 하룻밤 잘 생각해보고 그래도 내일까지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내일 와서 데리고 가자. "
아마 그 때 들었던 그 생각이 제 삶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쁜 강아지가 한 번 눈에 들어오고 나니 어린 시절에 강아지를 좋아하며 업고 다니기도 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몇 달 동안 침체되었던 내 마음에 작은 희망, 기쁨과 같은 씨앗이 피어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집에 오고 나서는 점점 더 강아지를 집에 들일 생각을 굳히면서 인터넷을 통해 '강아지 분양'이라는 단어를 검색하게 되었어요. 인터넷을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강아지들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관 검색어로 '유기견 입양'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지금 고백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뚱아저씨는 '유기견'이라는 단어가 전혀 생소했어요. 그 말뜻을 못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평소 살면서 접했던 그런 단어는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어.. 이게 뭐지?"라고 하면서 클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 블로거의 유기견 입양캠페인 포스팅을 보게 되었어요.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오늘 입양하지 않으면 안락사 당합니다."
비오는 날에도 거르지 않고 하는 이태원의 유기견 거리입양 캠페인
제가 그 포스팅을 보고 처음 본 사진에 그런 문구가 나오더군요. 뭔가 마음이 아릿하면서 계속 보게 되었고, 그 때 서울 이태원역 근처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유기견 거리 입양캠페인'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주선했던 단체가 '유기동물 행복찾아주는 사람들. 약칭 유행사'라는 단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마음 먹은 김에 바로 다음카페 중 하나로 있는 그 단체를 찾아가서 이것 저것 글을 읽어봤어요. 그 중에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라는 사진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클릭을 하게 되었어요. 거기에는 버려진 작은 믹스견 강아지들이 수십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 눈에 쏙 들어오는 강아지가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강아지들이었어요. 두 마리였으니까요.
그 때 제 눈에 쏙들어왔던 강아지. 흰순이와 흰돌이.
그 때 흰돌이와 흰순이를 처음보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결심을 했죠. "그래. 이 두 강아지들로 하자. 우리집에 마당도 좀 있고 하니까 얘들은 나중에 덩치가 커도 충분히 키울 수 있을거야. 이왕이면 애완견샵에서 사는 것보다 안락사의 위기에 있는 이 강아지들을 살리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난 후에 회원가입을 정식으로 하고 흰순이와 흰돌이의 입양공고 밑에 덧글로 "제가 이 강아지 두 마리를 입양하겠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그곳 카페지기인 분이 이렇게 답글을 달았더군요. " 두 아이 중에 왼쪽에 있는 아이는 장애견인데 괜찮겠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사진을 살펴봤습니다. 그 때까지는 몰랐었는데 왼쪽에 있는 아이의 한 쪽 다리가 안보이더군요. 하지만 그 때 저는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제가 잘 돌볼께요."
왠지 왼쪽에 있는 그 장애견 아이는 제가 돌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런 제 마음에 지금까지 4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단 0.1초의 후회도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선택,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 단체의 입양신청 절차는 매우 간단해서 그렇게 입양신청을 하고 난 후에 다음 주 토요일에 이태원역의 거리입양캠페인장으로 두 아이를 데리러 가기로 했어요. 흰색 백구인 두 아이에게는 '남자애는 흰돌이, 여자애는 흰순이'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 거였어요.
그리고 토요일이 되어 이태원역에 흰돌이와 흰순이를 데리러 가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제 귀여운 두 녀석들을 들인다는 생각에 밤을 꼬박 샌 것 같아요.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그 때 그 유행사 운영진들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혼자사는 남자가 백구 강아지를 두 마리 입양한다고 하니 조금 의심스럽다. 혹시 개장수가 아닐까?"
저는 혹시라도 저에 대해 의심을 할까봐 가입인사를 쓰면서 우리 집 사진도 일일이 찍어서 올리고 마당도 있다는 것도 알리고, 개집도 사놨다는 것도 인증샷을 올렸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 하루에도 수천명씩 방문하는 파워블로거였던 제 블로그도 링크를 시켜놨어요.
그것을 보고 난 후에는 그 유행사 운영진에서 저를 믿게 되었고, 그 때 부터는 "아. 저 사람이 마음이 변치 않고 꼭 이 애들을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 "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입양하겠다고 말을 해놓고 며칠 만에 변심해서 입양을 하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흰돌이와 흰순이는 나중에 덩치가 크는 백구인데다가 흰순이는 장애견이기 때문에 또 입양신청이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흰순이는 어떤 분이 한 달 전에 미국을 가면서 다녀오고 나면 자신이 꼭 입양을 할테니 다른데 입양보내지 말고 데리고 있어달라고 까지 얘기했는데 한 달만에 다시 연락을 해보니 "사정이 있어서 입양못하게 됐다"라고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흰돌이와 흰순이였기에 유행사 카페의 운영진들은 더욱 제가 변심을 하지 않고 토요일에 꼭 입양하러 데리러왔으면 하고 기다렸답니다. 그리고는 토요일이 된 거에요.
그 당시 트레이너일을 하던 저는 토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었어요. 평일에 트레이닝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 토요일에 모두 신청을 해서 토요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요. 하지만 그 날 하루는 미리 양해를 다 구해놓고 일을 다 접고 일찍 입양캠페인 행사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가 가장 먼저 흰돌이와 흰순이를 입양을 한 거였어요. 그 때 흰돌이와 흰순이를 입양한 기념사진이 이겁니다. ^^
입양 당시 흰돌이와 함께 찍은 사진
입양당시 흰순이와 함께 찍은 사진.
그렇게 흰돌이와 흰순이를 데리러 갔는데 이 아이들이 사진속으로 보던 것보다는 훨씬 크더라구요. 사진속에 있을 때보다 2개월 정도 더 지난 거였어요. 하지만 그런 것은 제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클 아이들이니까요.
그렇게 두 아이의 입양 절차를 마치고 흰돌이는 그 날 바로 중성화 수술을 하고, 흰순이는 아직 월령이 어려서 그곳 연계병원에 중성화 수술 예치금을 미리 지불하고 한 달 후에 수술을 하기로 하고 데리고 왔어요. 아마 그 때 든 비용이 검진비와 중성화 수술 비 합쳐서 50만원 정도 됐을겁니다.
그렇게 절차를 마치고 오는데 두 아이 중에 흰순이가 특히 더 마음이 짠했어요. 흰순이가 그 때 입양가기 바로 전에 케이지 안에 있던 사진은 지금봐도 마음이 뭉클해요. 뭔가 삶의 희망도 전혀없이 체념한 듯한 그 눈빛. 아직도 잊을 수 없답니다.
당시 입양직전 케이지 안에 있던 흰순이.
그 때는 제가 늘 걷기운동을 하느라고 차를 구입하지 않을 때여서 택시를 타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왔어요. 그런데 흰순이가 굉장히 심하게 침을 흘리는 거였어요. 입고간 까만 잠바가 흠쩍 젖어 짜면 침이 주르르 흐를 정도로요. 아마 흰순이는 정말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자기가 가는 그 곳이 어느 곳인지 잘 몰랐으니까요. 거기에 비하면 흰돌이는 천진난만해서 마냥 좋아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렇게해서 흰돌이와 흰순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거실에다 딱 내려놨는데 그 때 저는 굉장히 짜릿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차에 타고 올 때만 해도 너무도 긴장을 많이 하고 겁을 먹었던 흰순이였는데 거실에 내려놓자마자 아이가 갑자기 화색이 돌더니 정말 좋아하더라구요.
아마도 흰순이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 이젠 살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흰돌이와 흰순이는 거실의 여기저기를 막 돌아다니며 개껌을 주니까 너무도 좋아했어요. 한쪽 다리가 불편한 흰순이가 한쪽 몸이 기울어 개껌을 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거실에 내려놓으니까 무척 좋아하면서 개껌을 씹고 있는 흰순이와 흰돌이
목욕을 하고 난 후 뽀송뽀송한 흰돌이와 흰순이.. 아이 좋아라 ~
그렇게 해서 흰돌이와 흰순이는 저의 자식과 같은 존재가 되어 지금까지 4년 동안 제게 많은 의지가 되어주었답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입양을 계기로 해서 유기견이라는 단어 조차 생소했던 저는 유기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에 나이많은 요크셔테리어 초롱이를 임보하다가 입양을 했고, 순심이를 길거리에서 구조해서 지금 함께 살고 있고, 럭키는 동작대교 다리밑에서 구조해서 지금 함께 살고 있고, 그러다가 3년 전에 팅커벨프로젝트 카페를 설립하게 되어 지금까지 3백마리가 넘는 유기견묘를 구조해서 입양을보내게 되었네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흰돌이, 흰순이 어린 강아지 때 사진.
집에 놀러온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흰순이와 흰돌이.
그러니까 흰돌이와 흰순이라는 두 작은 백구 강아지들의 입양이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던 거에요. 그 때까지만 해도 파워블로거였던 유명 트레이너로서 수입이 괜찮았던 저는 "복잡한 것 다 신경쓰지 말고 맘껏 여행다니면서 인생 즐기며 살자"라는게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두 아이의 입양을 계기로 해서 사람이 아닌 동물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내가 손길을 뻗으면 살릴 수 있고, 손길을 거두게 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유기견, 유기묘들을 위해 한 번이라도 더 손길을 뻗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희 집에도 여덟 아이 강아지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게다가 팅커벨프로젝트라는 유기동물 구호단체 대표로서 수많은 가엾은 유기견, 유기묘의 가장이 되었답니다. 어깨도 무겁고 책임감도 더 크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블로그 이웃 여러분 모두 좋은 주말 보내시고 행복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