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글이 그리운 그대. 활자가 그리워 글을 찾는 방랑자여. 책게가 그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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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게 느껴진다.
'오... 오늘이야말로! 정말로! 진짜로!'
해는 저 지평선 넘어로 얼굴을 감춘지 오래지만 도심의 가로등과 네온사인은 주변의 어둠을 치워버렸다.
남들이야 신경쓰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느라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근방이었는데...'
예전부터 눈여겨 봐왔던 편의점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저기다!'
드디어 내가 찾던 편의점이 보인다. 흔한 체인점 간판을 걸고 있었지만 지금 나에겐 유일하다.
딸랑~
"어서오세요~!"
우렁차다. 진정 날 반기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그런 사실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새빨개진 얼굴을 보이는게 싫다. 내 맘을 읽혀버릴것만 같다.
"예~ 안녕하세요~"
이놈의 습관 때문에 나도 모르게 답을 해버렸다. 내 말을 들었을까?
'아냐아냐 들렸을만한 목소리는 아니야. 어서 내가 여기 들어 온 목적을 달성해야겠어!'
난 맘을 다스리기 위해 크지 않은 매장을 한바퀴 삥 돌았다. 내가 사려고 하는 물건은 진열대에 없다.
아니. 모르겠다.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매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신경쓰인다.
그렇게 두바퀴나 더 돌았지만 여전히 눈동자의 초점은 바람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그 방법 밖에 없는건가.'
크지 않은 매장을 도는 동안 심호흡을 세네번 한 후. 카운터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내가 매장을 세바퀴 도는 동안 이미 내 기척을 신경 쓰고 있었던걸까? 나에게 인사를 건낸다.
숙인 고개를 살짝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훤칠하다.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려온다.
그렇게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채인점의 이름이 적힌 직원조끼 뒤로 보이는 옷가짐에서 패션센스가 느껴진다.
영업용 미소가 살짝 걸려있는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보인다. 계산을 위해 왼손에 든 리더기를 앞으로 내려던 움직임이 멈칫 한다.
그럴 수 밖에 난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없다.
"저기..."
이런! 목이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이게 무슨 창피한 경우인가!
"예? 원하시는게 있나요?"
살짝 당황한 듯 하다. 하지만 이내 가볍게 미소지으며 나에게 물어온다. 그 미소를 보자 용기가 생긴다.
속으로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이내 내 뱉는다.
"코...ㄴ....ㄷ... 주세...ㅇ"
이런 빌여먹을!
"예!? 뭐... 뭐라구요?"
확실하게 당황했다. 안된다. 이러면 안돼. 내가 원하던건 이런게 아니다. 뭔가 다시 말을 해야한다.
"그... 그거 드리면 되나요?"
헛!? 알아들어버린건가? 으아아!! 머릿속에 미리 준비한 온갖 시나리오가 모두 박살나 버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상황은 예비 시나리오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설 순 없다.
"아. 예... 그걸로 주시면 되요."
다행이다. 목소리는 그렇게 떨리지 않는다.
"그... 뭘로 드릴까요?"
응?! 뭐지? 종류?! 모르는데? 이번엔 내가 당황했다. 난 그에게서 건네 받을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뭐라 말해야 할지 이미 머릿속은 백지상태.
오늘만은! 이라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또 실패하는 건가. 그럴 수 없다!
사전 정보가 너무 부족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별에 별 경우가 머릿 속을 지나갔지만 정작 흐른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아무거나 주세요."
"아무거나요? 그... 그럼 이번에 새로 나온 걸로 드려볼까요?"
"네. 그걸로 주세요."
다행이다.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끝났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집어준 물건을 받아만 낸다면 그거면 된다. 내 뒤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계산하는 그 순간조차 너무 초조하다.
"2000원 입니다. 이번에 새로 아담하게 나왔더라구요. 갯수는 ...개로 줄었지만 향은 좋다고 하던데요? "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건네주며 다정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 너무 고마웠다. 중간에 못들은 말이 있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현금계산을 끝내고 매장문을 열고 나왔다. 닫히는 매장문을 등지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끼며 걸었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다. 그에게서 건내 받았다. 이 내 손에 결과물이 있는거야!'
한 없이 진심으로 기뻣다. 오늘! 드디어 성공했다. 비록 고비는 있었지만 결국 손에 넣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허리가 펴진다. 난 성장했다. 당당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성공 했으니 다음은 더 쉬울꺼다.
오늘 같이 못볼 꼴은 보이지 않을 꺼다.
난 당당하게 걸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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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된 걸까. 난 분명히 샀다. 그의 손길을 탄 물건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어쩐지 싸더라... 14개라고... 잘못들은줄 알았지..."
"야 이 병신아! 콘돔도 못 사오는 병신아! 내가 못살아! 사오겠다고 당당하게 나갈 땐 언제고 고작 사온게 14개짜리 블루베리향 담배냐?"
"으이그 이 등신아! 됐어! 연락하지마! 나 잡지도 마! 따라 나오면 넌 오늘 진짜 죽을 줄 알아!"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녈 잡지도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쾅!
떨리는 손으로 뜯은 포장지 안에는 내가 원하던 물품은 없었다. 대신 담배 14개피가 날 반기고 있었다.
그것도 블루베리향 던힐. 한번도 콘돔을 사보지 않은 나에게 그 조그마한 담배각은 어김없는 콘돔이었고, 난 성공했다는 벅찬 가슴에
확인도 하지 않고 달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거하게 까였다. 그녀는 가버렸다. 영원이 가버린 것일까?
밖으로 나와 멍 하니 하늘을 올려다 본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병신이라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것일까? 1년중 가장 큰 보름달이 내 모습을 비춘다.
치익... 스읍.... 후우....
"달 한번 더럽게 밝네..."
꼬나문 담배에서 흘러나오는 블루베리향을 맞으며, 내 볼엔 달빛 머금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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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