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보게된 이상화 기자의 글입니다.
모든 기자분들이 기레기는 아니고 실종자 가족들을 생각해 주는 분도 있습니다..
[젊어진 수요일] 처음입니다 기자가 된 걸 후회했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4.04.23 00:44 / 수정 2014.04.23 02:18 청춘리포트 … '세월호' 현장을 가다
120시간의 취재수첩
지난 16일은 청춘리포트의 편집회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예고한 대로 우리는 ‘대학생의 성(性)’을 테마로 다음 장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전 상상도 못했던 대형 참사가 터졌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말입니다. 우리 팀 기자들은 당장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언제나 치열한 취재 현장은 20~30대 젊은 기자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고에서 기성세대는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했습니다. 60대 후반의 선장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고, 대개가 50~60대인 정부 관료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쪽에선 20대 여성 승무원과 30대 교사가 학생들을 먼저 구하려다 죽어갔습니다. 청춘리포트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2030 기자들의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120시간. 이번 참사를 바라보는 청춘세대의 시각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16일 23:50,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잠수부가 칠흑의 바다 헤맬 때 상황실 문틈에선 치킨 냄새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는 초기 지휘부였다. 나는 사고 첫날부터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에서 중대본을 취재했다. 중대본의 처음 닷새는 한마디로 ‘우왕좌왕’이었다.
특히 사고 당일(16일)은 무능한 정부를 제대로 체험한 날이었다. 오후 9시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갈팡질팡하던 중대본 관계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탑승자 462명, 사망자 4명, 구조자 174명, 실종자 284명. 이게 확실한 수치입니다.”
드디어 중대본이 제대로 돌아가는구나.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오후 11시43분쯤 인천 청해진해운에 나가 있는 동기 이서준 기자가 “해양경찰과 청해진해운이 숫자를 다시 세고 있다”고 알려 왔다. 나는 당장 중대본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불러준 숫자가 맞아요? 실종자 명단도 공개하세요.”
이 관계자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실종자 명단은 없습니다.”
뚝-. 전화는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시계는 자정을 향했다. 3층 브리핑룸에 있던 나는 1층 상황실로 뛰어갔다. 그런데 상황실 문을 연 순간, 치킨 냄새가 풍겨 왔다.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 등 중대본 고위 관계자들이 야식을 먹고 있었다. 실종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 못한 마당에 치킨이 넘어갈까. 나는 치킨을 권하는 손길을 뿌리친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후로도 중대본은 탑승자·실종자·구조자 숫자를 또 다시 수차례 정정했다. 그날 밤 치킨을 앞에 둔 강병규 안행부 장관 곁에선 잠수부의 심야 수색이 곧 시작된다는 방송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종문 기자
17일 01:00, 진도체육관
“저 기자인데요” 어렵게 뗀 한마디 … 그리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갓 3년차 기자인 내게 재난 현장은 버거웠다. 느닷없이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감히 물어볼 수 있을까.
17일 자정 두려운 마음으로 진도체육관으로 들어섰다. 세월호 침몰 15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가족의 생사를 알 길이 없는 1000여 명이 울부짖고 있었다. 아들과 딸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도 바다 쪽에선 기별이 없었다. 차가운 바닷속 아이들은 이런 애끓는 사랑을 알까. 나는 울음을 눌러가며 실종자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저, 기자인데요….”
한 어머니는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떤 아버지는 내 휴대전화를 빼앗아 던져버리기도 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가만히 돌아섰다. 그들이 기자를 밀어내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사건이 터지면 속보 경쟁을 하느라 취재원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는 일들이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실종자 가족을 계속 취재해야 했다. 재난 보도는 언론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재난의 실체와 원인을 정확하게 알려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신 나는 실종자 가족 인터뷰의 원칙을 세웠다. 내가 궁금한 것을 캐묻기보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들어줄 것.
세월호 침몰 엿새째. 실종자 가족들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간다. 내가 쓴 기사를 통해 저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허술한 국가 재난 관리 시스템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나는 무거운 어깨를 추스르며 오늘도 진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이유정 기자
17일 04:00, 진도 팽목항
시신 입 벌려 치아 확인하는 어머니, 그 아픔을 기사에 담을 자신이 …
17일 오전 4시쯤으로 기억한다. 진도 팽목항에는 수백 명의 실종자 가족이 먼바다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부둣가 한쪽으로 앰뷸런스 석 대가 들어섰다. 우르르 몰려든 부모들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앰뷸런스에는 시신 두 구가 실려 있었다.
자그마한 몸뚱이를 감싼 흰 천을 구급요원이 들어올렸다. 신원미상의 여성 두 명이었다. “모르겠어. 얼굴을 봐도….” 바들바들 떨던 부모들이 풀썩 쓰러졌다.
한 어머니는 맨손으로 시신의 입을 벌렸다. “내 새끼가 맞는지 치아를 확인해야겠어.” 이 어머니는 자갈밭에 엎어져 통곡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 장면을 나는 기사로 옮기지 않았다. 몇몇 단어로 저 애통한 마음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4년차. 나는 처음으로 기자가 된 걸 후회했다.
슬픔이 분노로 뒤바뀐 건 다음 날 목포해양경찰서로 취재 현장을 옮기면서다. 세월호를 버리고 달아났던 이준석 선장이 이곳에서 수사를 받았다. 그가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올 때였다. 나를 비롯한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지만 그의 답변은 간결했다.
“퇴선 명령을 했습니다. 잠시 침실에 있었지만 술은 안 마셨습니다.”
나는 그의 뻔뻔한 대답을 기사로 옮겼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충분히 담을 순 없었다. 재난 현장을 기사로 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진도 해역은 사흘 내리 비가 내렸다. 오늘(21일)에야 겨우 햇살이 비친다. 하늘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내려준 희망의 빛줄기이길 바라본다.
채승기 기자
18일 23:00, 인천 청해진해운 본사
직원들은 그저 “모른다”만 되풀이 … 닫힌 철문은 여전히 답이 없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인천 본사는 세월호 침몰 당일부터 철문을 굳게 닫았다. 선사 관계자가 한 명이라도 밖으로 나오면 수십 명의 취재진이 그를 둘러쌌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모른다”고만 했다. 언론 대응을 맡은 김모 부장은 “영업팀에만 있어서 아는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회사는 세월호에 승선한 인원 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사고 당일 477명이라고 했던 승객수는 며칠 뒤 475명으로 정정됐다가 또다시 476명으로 뒤바뀌었다.
저들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세월호의 운영사가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인천여객터미널을 취재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박 탑승 시에 정확한 승객 인원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던 것이다. 표를 끊고 직접 이름을 적어내면 터미널 직원이 그 종이를 찢어서 모았다. 이것이 승선 인원을 파악하는 절차였다. 아무 이름이나 적거나 아예 안 적어도 그만이었다. 18일 밤 취재진 사이엔 침몰한 세월호에 이름을 적지 않은 승객이 더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전근대적인 탑승자 관리를 보면 있을 법한 이야기란 생각도 들었다.
청해진해운은 ‘무책임’ 해운이었다. 언론 대응은 물론 탑승객 관리도 책임 없는 자세로 일관했다.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버려두고 먼저 달아났던 선장과 선원들도 이 회사 소속이다. 저 무책임한 회사가 운영하는 선박에 325명의 어린 동생들이 올랐다가 끔찍한 침몰 사고를 당했다. 답답한 마음에 철문을 두드려 보지만 청해진해운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서준 기자
21일 09:00, 슬픔에 빠진 안산시
“위층에 사는 가족들이 안 보여요” 택시기사는 뉴스 들으며 한숨만
“우리 빌라가 2층인데 4층 집이 그날부터 안 보여요. 차마 물어볼 수도 없고. 동료 택시기사 중에도 사망 학생 부모가 한 분 있고요. 착한 학생으로 들었는데….”
16일부터 세월호 침몰 관련 취재를 하느라 택시를 타고 안산시를 돌아다녔다. 어떤 택시든 분위기는 비슷했다. 침울한 표정의 기사들은 라디오로 세월호 침몰 뉴스를 들었다. 몇 마디만 나눠도 한숨을 쉬며 사고를 당한 이웃 얘기를 꺼냈다.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피해를 당한 단원고 학생을 여럿 알고 있었다. 형제가 몇 명인지, 아버지 직업이 뭔지 줄줄 뀄다. 21일 오전에 만난 한 택시기사는 “이웃집 학생이 실종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고잔동에서 만난 구모씨도 “조기축구회를 하는데 실종 학생을 자녀로 둔 회원만 4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남겨진 학생들의 고통은 더 컸다. 안산 시내 고교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도 교복을 입었다. 조문을 가기 위해서였다. 단원고 인근의 선부고 2학년 윤모군은 “18일부터 안산 고려대병원을 매일 들렀다”고 했다. 구조된 학생은 말할 것도 없다. 고대 병원에서 만난 한 학생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활발한 아이였는데 구조된 이후 계속 우울한 상태”라고 했다.
취재를 하면서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곳 안산은 마치 폭격을 맞은 전쟁터처럼 황망한 분위기다. 안산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웃이 겪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아파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손길도 늘어나면 좋겠다.
이상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