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콘센트 하나가 망가진 것 같습니다.
꽂아도 기기들이 작동을 안 하네요.
수리를 맡겨야 할 것 같은데 근처 집수리 업체들은 수도 보일러 공사는 해도
전기 공사는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콘센트에 연장선 달아 쓸 수는 있지만 너저분해져
망가진 콘센트를 살리고 싶은데 수리점을 찾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걸까요...
*자존감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자신감.
*행복의 상수와 변수.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란 상수는 최대한 키우고 변수는 줄이는 것이리라. 만약 그것이 한계에 다다른 듯 보인다면 그 둘을 뒤바꾸는 방법도 시도해볼만 하다. 상수는 변수로 변수는 상수로.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것을 내일이라도 사라질 것으로. 찰나에 불과할 것이라 믿었던 것을 다시 눈 뜨더래도 그 찬란함을 잃지 않을 것으로. 
*거대한 비극은 삶 전체를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했다. 비극 이후 삶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거대한 비극이 무너뜨리는 것은 삶의 거대한 일부일 뿐이다. 그 거대함 때문에 당장 눈에 드는 것이 없을 뿐 삶의 다른 부분은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존재한다. 보이지 않아도 수평선 너머 다른 대륙이 존재 하듯.
무너진 거대한 삶의 부분을 재건하던지, 남겨진 작은 삶의 부분을 거대하게 키우던지 좋을대로 하라. 비극은 삶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다.
*남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나는 정말 '남'을 위한 걸까, 아니면 그 남이 받는 상처에 상처   받는 '나'를 위한 걸까.
내 사죄는 정말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누군가를 위함일까?  그 누군가의 상처로 인해 상처 받는 나를 위한 얄팍한 술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내 사죄로 누군가의 상처가 치유된다면, 그로 인해 내 상처도 치유된다면 내 사죄는 진정한 사죄일까?
*다만 그것이다.
*아무래도 난 네츄럴 본 냥덕인가 보다.
*지옥보다는 지옥이 없다는 것이 더 두렵다.
*훼손 되지 않는 정의도, 정의를 따른다는 착각도... 
 어째 정의에 관련된 건 다 무섭냐..
*'우리'가 국가를 따를 것인가
국가가 우릴 따라야 할 것인가
*우리가 국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때론 폭력이다.
*상대성 이론은 잔인하다.
웃으며 먹고 놀아도 결코 4월 16일을 잊지는 않는다. 
그게 내 최소한이다. 잊는 순간 난 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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