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겪으면서 많이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대체 이 위험하고 아프고 힘든 출산 과정을 변변찮은 의료기술도 없던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겪었던 거야?"
이런 생각에 이르자 애 낳다가 죽은 많은 역사 속 궁중 여인들이 기억 났다.
공민왕의 부인, 노국공주도 애 낳다가 죽었고..
세종대왕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아내,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도 단종 낳다가 죽었고..
중종의 아내, 인종의 어머니였던 장경왕후도 인종을 낳다 죽었고..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맡았던 역할인,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는 반복된 임신과 출산, 유산을 겪다가 만삭의 몸으로 죽었고.. (임신 중독증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함)
나라에서 가장 내로라 하는 실력 있는 의원들이 달려들어서 출산을 도왔을텐데도 이렇게 높은 신분의 여자들도 산모사망을 피할 수 없었으니 옛날 여자들은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애를 낳아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21세기의 지금도 아프리카 지역은 26명당 1명꼴로 출산을 하다 사망하고, 의료 서비스가 아주 낙후된 아프가니스탄, 니제르 같은 나라들에서는 7명 당 한 명 꼴로 죽는다고 한다.
아무런 도움 없이 그냥 쌩으로, 아주 원시 자연 상태로 아기를 낳아야 했던 많은 우리 조상들은 아마 5명~7명 당 한 명 꼴로 죽지 않았을까 싶다.
대한민국의 산모사망률은 10만 명당 11.3명이라고 하는데(2018년 기준), 의료 인프라가 좋은 수도권이나 서울은 이보다 낮은 편이고 강원도처럼 산부인과가 드문드문 있고 큰 병원이 부족한 곳은 10만 명당 32명까지 죽는다고 한다.
아무튼 각설하고..
애를 낳는다는 것은 이처럼 자신의 온 몸을 다 바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온몸을 다 바치고 젖먹던 힘을 다 짜내야만 하는 출산의 클라이맥스는 '막판 힘주기'였다.
..
자궁문 6cm부터 7cm까지는 무통주사의 힘으로 큰 고통 없이 진행했던 것 같다.
7cm 정도 열렸을 때부터 슬슬 약발이 떨어지면서 고통이 조금씩 커져갔다.
제발 출산의 막바지까지 무통빨이 버텨주기를 바랐으나 엄청나게 커져가는 진통의 강도와 반대로 무통의 효과는 쭉쭉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출산했던 그날은 병원의 분만실이 산모들로 가득 차 있던 날이었다. 병원이고 조리원이고 산모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이 나라가 저출산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산모에 비해 분만실 간호사 수는 적어서 막판 힘주기를 하는 동안에도 분만실에는 나와 남편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어쩌다가 간호사님이 들어와서 힘주기 코치를 하고 나한테 비명 지르지 말라고 야단치고 가시고는 했다.
힘주기를 할 때에는 고개를 들고 무릎을 구부리면서 산모의 몸이 C자가 되도록 만다. 그 상태에서 자궁이 수축되는 느낌이 들면서 진통이 강하게 올 때, 있는 힘껏 똥을 누듯이 아래에 힘을 쭈욱 줬다.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참으면서 밑으로 힘을 쭈욱 쭈욱~~최대한 길게 길게 주어야 한다!
힘을 짧게 주면 아기가 내려오다 말고 다시 위로 올라가 버린다. 최대한 힘을 길게 쭈우우우욱 10초 이상은 줘야 아기가 쑥쑥 내려온다.
유튜브 '맘똑티비'에서 힘줄 때 비명 지르지 말고 얼굴에 힘주지 말고 아래쪽으로 똥누듯이 힘을 줘야만 고통스러운 분만 과정이 빨리 끝나고 얼굴의 실핏줄이 터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겠다고 다짐했는데.. ㅎㅎ 이론을 알아도 현실은 아는 것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비명을 막을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아파 그냥 내가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지금 내가 쌩으로 극악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비명이 안 나오냐고 ㅠㅠㅠㅠㅠㅠ
어쨌든 간간히 터져 나오는 비명은 참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힘을 길게 쭈욱 주는 것만큼은 해나갔다. 아기가 점점 밑으로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은 점점 커져가고 아기는 밑으로 내려오는 것 같은데, 분만실에는 나와 남편뿐이고 지금 내가 힘 주는 방법이 제대로 된 건지, 이게 맞는 건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막판 힘주기를 하면 드라마의 출산 장면에서처럼 많은 의료진들이 나를 둘러 싸고 힘주는 방법을 코치하면서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이 병원만 그런 건지 다른 병원도 그런 건지 나의 현실은 정말 막판 막판 최후의 순간 직전까지 남편과 둘이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진통도 심하고 이러다 남편하고 둘이 있는데 아기가 나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나의 고통이 하도 극심해서 서로 아무 대화도 안 했지만 남편도 같은 걱정을 하면서 간호사를 불러서 물었다.
"혹시 이러다 아기 나오는 거 아니에요?ㅠㅠ"
간호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 "아기가 그렇게 빨리 나오지 않아요. 앞으로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할 거예요."라고 하면서 가버렸다.
그래..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나 혼자 힘을 줘야 하는구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열심히 남편과 둘이 라마즈 분만 심호흡을 하며 힘을 줬다.
남편은 옆에서 "자기야, 너무 세게 힘 주지 마ㅠㅠ 아직 옆에 의료진도 없고 나만 있는데 애 나오면 어떡해.."라며 걱정을 하고, 어쩌다 얼굴을 비추는 간호사는 "엄마, 더 힘 줘야 돼요. 더 세게!" 라면서 나갔다. 모순되는 말을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묵묵히 힘을 줄 뿐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점점 통증의 강도는 참을 수 있는 한계치를 벗어나 저멀리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느낌이었고, 어느 순간 진짜 이건 미치겠다 싶은 고통이 찾아왔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남편한테 "간호사 불러 제발 제발 ㅠㅠㅠ"을 외쳤고, 남편이 분만실 밖으로 나가 간호사를 붙잡고 제발 와달라고 사정했다.
간호사가 들어와 내진을 했다. "9cm네요, 산모분! 이제 30분 안에 애가 나올 거예요."
하.. 결국 9cm까지 나 혼자 왔구나..
9cm까지 열리고서야 비로소 간호사 두 명이 붙어서 힘주기를 코치해 줬다.
7cm부터 이미 고통이 너무 극악해서 대환장파티기에 접어들었지만, 9cm부터는 진짜로 레알 헬 오브 헬 고통이었다.
"다리를 더 넓게 벌리고!! 쫙~!!"
하지만 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다리를 더 넓게 펼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이 잘 들지 않았다. 내가 다리를 넓게 잘 못벌리자 간호사가 손으로 다리를 좌우로 억세게 꾹 누르면서 더 넓게 펴도록 했다.
"호흡해요 호흡!!! 아기한테 산소 가게 크게 들이마셔요!!! 왜이렇게 못해요!! 호흡!!!!"
호흡이고 나발이고 그냥 아파 죽겠는데 뭘 어떻게 더 하란 건지 .. ㅜㅜ 호흡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내가 영 호흡을 못해서 그런지 어느새인가 산소 호흡기가 입가에 씌워졌다.
"힘!!!!!!"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힘주기..
힘을 줄수록 이어지는 엄청난 통증...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산모분, 비명 지르면 안 돼요!!! 입 다물고!!!! 힘이 얼굴로 가지 말고 아래로 가게!!"
"(읍읍읍읍) 흑흑흑흑 (눈물 주륵주륵주륵)"
"울지 말고!!!!!!! 숨 들이마시고 참으면서 힘!!!!"
"끄으으으으으응!!!'"
어떻게든 아기를 빨리 나오게 한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힘 하나는 오래 줬다..
"힘 오랫동안 잘 주네. 이제 아기 머리 보여요!! 더 힘!!!!!!"
아기 머리가 보인다고 하니 안심이 됐다.
잘 내려오고 있구나.. 아기 머리가 보인대!!! 좋아!!! 이 고통이 거의 다 끝나가는 거야!!!
아기 머리가 보이기 시작할 쯤, 그러니까 정말로 출산을 하기 아주 바로 코앞 직전이 되어서야 담당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와서 아기 받을 준비를 하셨다. 원래 이렇게 담당 의사 선생님은 거의 못보면서 출산을 하는 거였나..?
아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막판 힘주기 하는 과정 언제쯤에인가 회음부를 가위로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인지 전혀 기억도 안 날만큼 그 정도의 통증은 엄청난 분만 통증에 가려져 가위로 자르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아기 머리가 보인다고 할 때부터는 진통이 그야말로 최고조를 찍어서, 세상에 이런 비현실적인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도대체 지금 이 순간이 현실같지가 않고 끔찍한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다. 내 앞에 있는 간호사들의 형체도 분간되지 않고 뿌옇게 느껴졌고 머릿속은 새하얗고 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내 몸이 강제로 힘을 주게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산 채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엄청난 통증에 저절로 몸이 비비 꼬아지면서 잠시 몸을 비틀면 "산모분!!!!!!! 몸 비틀지 마요!!!! 몸 비틀면 아기 어깨가 자궁에 걸려서 뒤틀릴 수 있어요!!!! 왜 본인 생각만 해요!!!! 아기 생각을 해요!!!!!!!"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파 죽겠는데 왜이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냐고 야단치는 소리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진짜 몸이 버틸 수 있는 통증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의 강도는 그 한계치를 넘어서 지붕 뚫고 대기권 뚫고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점점 더 세지고 세질 뿐이었다.
간호사 한 명이 내 배 위로 올라타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배를 꾹 누르면서 아기가 나오도록 도왔다.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소리 지르면서 안간힘을 주는 나와 내 배 위를 올라타 배를 누르는 간호사, 그리고 밑에서 아기를 잡아 당기는 또다른 간호사...
지금 이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라 출산을 하는 한 마리 울부짖는 짐승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좋으니 제발 빨리 나와줬으면 싶었다..
"힘!!!!!!!!!!!!!"
"자 이제 힘 좀 빼고~~!" (이렇게 힘 빼라고 할 때에는 정말로 힘을 완전히 쭉 빼야 한다. 안 빼면 아기가 너무 급속도로 질을 내려오면서 회음부가 열손상으로 너무 많이 찢어진다고 한다. 물론 힘을 잘 빼도 회음부가 어느 정도 찢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힘!!!!!!!!!!!! 자 이제 세 번 정도만 더 힘 주면 아기 나올 것 같아요!!"
세 번이란다, 세 번!! 드디어...!!
정말 젖먹던 힘..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어 마지막 세 번이란 말에 더 힘을 뽝!!!! 주었다.
그러나 간신히 세 번의 힘을 짜냈는데도 아기는 나오지 않고, 또 "힘!!!!!!!!!!!!!!!!!" 이라는 간호사의 외침이 들렸다.
아씨.. 세 번이라면서 ㅜㅜ 세 번이면 된다면서 ㅜㅜㅜㅜㅜ
아무리 간호사들한테 혼나도 극도로 세져만 가는 고통 속에서 비명은 자꾸만 터져나왔고, 고통이 절정에 이르면서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매운 산고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절정의 통증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힘을 줘야 하나
영혼이 다 가출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서릿발 칼날진 절정의 그 고통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힘을 꾸욱 주는데, 순간 얼굴이 풍선처럼 부푼다는 느낌이 들며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진짜로 '풩!'하고 얼굴이 터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나중에 보니 이때 얼굴과 눈의 실핏줄이 진짜로 다 터져서 도마뱀같은 피부가 되어 있었다) 아기 머리가 쑤욱 수박처럼 나왔다.
그리고 들리는 아기 울음 소리...
"응애..응애..응애..."
오전 10시 10분, 마침내 길고 길었던 산고가 끝나고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의 첫 울음소리는 너무 전형적인 아기 울음 소리라서, 살아 있는 내 아기가 우는 게 아니라 신생아 효과음을 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모분, 아기 나왔어요. 아들이네요." (초음파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유도분만 없이 자연 진통만으로 낳고, 자궁문도 빨리 열리면서 아기도 잘 내려오고, 아주 순산했어요."(왓더..???!! 소오름... 이게 순산이면 난산은 도대체 어떻다는 거?ㅠㅠ)
간호사가 아기를 내 왼쪽 가슴 위에 얹어 주었다.
사실, 아기를 첫대면하는 순간 나는 내가 너무 감동하고 감격해서 울 줄 알았다.
남의 출산장면을 유튜브로 보면서도 길고 지리했던 분만과정이 끝나고 아기가 태어나 엄마와 아기가 첫대면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와 왈칵 눈물을 쏟고는 했던 나였다.
그러나 막상 나의 출산이 끝나고나자 나는 완전히 탈진해 버리고 그냥 넋이 나가 버려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나고 아기를 쳐다볼 기운조차 없었다.
간호사가 가슴 위에 얹을 때에도 아기가 궁금하고 감격스럽기보다는, 힘들어 죽겠는데 왜 이런 무거운 걸 내 가슴 위에 올려... 이런 느낌이었다.
힘들어 정신이 나간 와중에 그래도 아기를 쓱 쳐다봤더니, 양수에 팅팅 불어 쭈글쭈글하고 벌건 피부를 가진 아주 작은 생명체가 내 가슴 위에서 울고 있었다.
너니...? 내 뱃속에서 꿈틀댔던 그 생명이 너니..?
아기를 보자 그래도 넋이 나간 와중에도 약간의 감격스러운 마음은 들었던 것 같다.
너라는 생명을 틔우기 위해 엄마가 이 지옥의 고통을 건너왔단다,아가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출산하고보니 서정주 시인의 이 시는 산고에 대한 시였구나 싶었다...
아기를 낳자 남편이 영상을 찍으면서 들어왔다. 낳기 직전이 되었을 때 이 병원은 남편을 분만실 밖으로 나가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왜??? 분만하는 마지막 순간을 제일 영상 찍어 놓고 싶었는데 ㅜㅜ)
나중에 남편이 찍은 출산 직후 나의 모습을 보자 얼굴 표정이 진짜 핏기 하나 없이 영혼이 가출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이 사진을 본 시누이 남편이 "형수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네요."라고 단톡방에 썼는데, 진짜 그때 사진에 찍힌 내 얼굴 표정은 모든 분만의 고통을 함축해 놓은 듯 했다. 이때 좀 후회되는 것은 그래도 정신이 없고 아프지만 아기와 함께 얼굴이 잘 나오게 투샷을 좀 찍어 놓을걸 싶었다. 나중에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아기 얼굴이 완전히 잘 보이게 찍어 놓은 사진도 없고, 나와 아기의 얼굴이 함께 잘 나오게 찍은 투샷도 없어서 아쉬웠다.
"고생했어, 고생했어."라고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아기의 탯줄을 잘랐다.
이제 끝인가..? 이제 이 엄청난 고통이 드디어 끝난 건가...??
끝나긴 개뿔..
물론 완전 고문하듯 아팠던 그런 극심한 통증은 가셨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태반을 비롯한 몸 속의 찌꺼기들을 배출한다고 배를 또 한번 꽉 눌러서 아팠고 그 다음엔 30분 가량 주치의 선생님이 회음부를 한땀 한땀 이태리 장인처럼 꿰매셨다. 사실상 분만 과정 내내 거의 얼굴 한번 못보다가 낳기 일보직전에 오셨기 때문에 주치의 선생님은 회음부를 봉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가 싶었다.
30분 동안 회음부 꿰맴을 받으면서 그저 빨리 모든 게 끝나고 통증이 안 느껴지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신음 소리 한 번 안내고 가만히 있자, 주치의 선생님이 "너무 조용하니까 걱정되는데?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회음부를 꿰맬 때 따끔따끔 아프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때 혼이 완전히 나가고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무통주사의 기운이 남아 있었던 건지 모르겠는데 따끔거리는 아픔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오로지 '제발 빨리 다 끝났으면'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봉합이 다 끝나고 회복을 위해 분만실에 두어시간 가량 누워있는 시간을 가졌다.
출산하는 동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목이 엄청나게 말랐다.
나는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고 피흘리는 군인이 "물~~ 물~~~" 하는 것처럼 애처롭게 물을 찾았다.
남편이 밖에 나가 편의점에서 하늘보리 패트병을 세 병 사왔다. 남편이 준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보리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한바탕 운동을 거하게 하고 난 뒤 마시는 맥주처럼 캬~ 시원했다. (사실 산모는 차가운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물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남편들은 아내가 출산하기 전에 미리 물을 잘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것이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작은 패트병 하나를 다 마셨지만 전혀 갈증이 가시지 않아 연속해서 패트병 세 병을 다 비웠다. 그래도 갈증이 어쩐지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뱀파이어가 되어 끊임없이 사람의 피를 목마르게 찾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렇게 물을 마시면서 두어시간 가량을 쉬고 난 후, 나는 휠체어에 회음부 방석을 깔고 앉아 분만실에서 병동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나는 내 살아 생전 처음 겪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맛보았던 <지옥>에서 벗어나, 산고보다는 좀 더 낮은 고통 단계를 가진, '찢어진 회음부와 거대한 치핵, 그리고 젖몸살이 주는 산후고통'이 기다리는 <연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