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밑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가 무슨 의미인지 질문하신 글이 있어서 예전에 써본 글 하나 올려봅니다. 대략적인 글이고 깊이있는 내용은 아니니 참고로만 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존재와 무>와 같은 철학책은 제대로된 번역서가 없다는 것도 있지만 내용자체가 후설의 현상학 그리고 하이데거의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입니다. 이런 정공법 대신 아래에서처럼 <구토>같은 문학작품이나 아니면 <문학이란 무엇인가>같은 문학관련 작품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먼저.."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주목해야 될 개념이 '자유'입니다. 그의 최초의 문학작품이었던 <구토>에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고 할수있는데요.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 혹은 존재자들의 불필요함과 과잉, 우연을 느끼고 구토를 느낍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이유없이 나타나서 아무이유없이 사라지는 존재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과잉은 결과적으로 '신'의 부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결과 사물의 이러한 우연성과 불필요한 과잉이 그에게 구토를 불러일으켰던 원인이었죠. 그러다 그는 카페에 앉아 음악(소피터커의 some of these days)을 듣다가 구토가 가라앉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음악은 하나의 정교한 수학적 구조와 형식을 가짐을 깨닫습니다. 일찌기 피타코라스가 음악에 수(학적 구조)가 숨어있음을 간파하듯이 그는 음악을 통해 우연하고 무질서해보이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성질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로캉탱의 구토를 멎게 할수있었던 방법론은 미학이었던 셈인데 여기서 한가지 더 주의해야 할 부분은 그가 이러한 스스로의 변화(구토의 사라짐)을 꽤 할수 있게 했던 것은 로캉탱이라는 주체가 스스로 과거의 존재(구토를 느끼는 존재)에서 미래의 존재(구토를 느끼지 않는 존재)로 변화할 수있게 만든 계기 그자체인데 그것이 바로 '자유'였던 것이지요. 사실 '자유'라는 개념을 상세히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만 사르트르철학이 강력하게 영향받은 후설로부터 유래되는 현상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후설의 철학보다는 이를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하이데거는 그의 출세작인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현존재Dasein으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seienden와는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자체를 할 수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은 다른 사물들이나 존재의 이유나 원인에 대해서 어떤 물음이나 의구심을 가질 수없는 존재인 반면 인간은 주변의 사물에 대해서 아니면 더 나아가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대서 물음을 던질 수있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으로하여금 이러한 존재물음 (사실은 철학자체도 고대 그리스이후 이러한 존재물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망각하여왔다고 그의 책에서 지적하고 있죠) 을 가능하게 한 원인 중 '불안'이나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그는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불안이나 "사물의 비본래성"에 대한 자각이 인간을 현존재로 규정할 수있게끔 만들었고 이러한 개념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연결된다고 볼수있게 됩니다. (하이데거 본인은 이러한 설명을 거부합니다. 특히 후기로 가면 전기의 실존주의적 경향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존재자체의 사태'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기울게 되지요) 다시 '실존'개념으로 돌아와 보지요. 실존이라는 개념도 하이데거의 현존재처럼 인간에게만 적용가능한 개념입니다. 본질이라는 개념이 인간처럼 대자적 반성이 가능한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자들 모두가 가질수 있는 성질이나 내용을 의미한다면 사물적 존재자들의 그 본질은 자연이 그 사물에게 우연히 선사한 그 최초의 성질로부터 벗어날 수없습니다. 설령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피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안의 존재일 따름이고 전적으로 외부적 영향의 지배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지요. 반면 인간은 자신이 가진 과거의 기존 성질들로부터 능동적으로 변화할 수있는 존재입니다. 실존을 다른 말로 하면 탈ex존istence 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존의 존재적 본성 혹은 본질로부터 벗어날 수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인 셈이지요.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단지 본질의 지배를 받는다기보다는 이러한 본질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존재자가 될 수있는 자유를 가진다라고 보았던 것이고 이러한 인간주체의 능동성에 대해 강조했던 사상이나 철학을 후대에 우리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이 실존주의 사상은 카뮈를 비롯해 60년대이후 구조주의가 프랑스에서 태동하기전까지 프랑스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주체에 대해서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이 품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사상계를 지배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에 의해 집중적으로 비판 받게 된 결과 실존주의라는 사상 전반이 시대에 뒤진 어떤 것쯤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만 사르트르의 몇가지 사상의 단초들 (예를들어 상상력등의 개념)은 들뢰즈등에 의해서 재조명 받기도 하였고 오늘날 구조주의자체도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게 되면서 그들의 사르트르 비판이 과도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만 일단 대충 생각나는데로 몇줄 적어봤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사르트르관련 책들을 직접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