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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러프킨의 노동의 종말에 따르면 현대에는 어떠한 수를 써도 모든 이의 고용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2500만 중에서 단지 13만명의 1차산업인구로 그 모든 농사와 어업과 양식업과 축산업이 돌아가는 나라인 것이 현재의 상태이다.
참고로 내가 어렸을 적에는 라떼에는 1차산업인구만 경제활동인구의 20프로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단지 470만명으로 모든 제조업이 커버가 쳐 진다. 그 외에는 서비스업종사자인데, 이 것마저도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미국학자인 제레미 러프킨은 일자리가 없는 태반의 인구에 대해서는 이미 소매금융이 구매력을 제공했음을 지적하였고, 일본과 한국 또한 그 것은 마찬가지이다. 한국 역시도 00년대와 10년대에 일어난 소비의 태반은 가계부채에 의해서 지지된 것이다.
특히 일본새끼덜이나 한국것들이 6시 내고향 요따구 것이나 쳐 보여주면서 그들의 구시대적인 규범에 맞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작자들이나 쳐 보여주지만 그 농부새끼덜의 단감이나 포도나 딸기도 도시민들이 빚내서 사지 않았다면 팔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나마 현재 한국이 가계부채로라도 견딜 수 있는 것은 1990년대까지 완전고용이 달성되던 세대로부터 여전히 자산이 있는 세대주밑에 종속된 현재의 세대까지는 실업자라고 하더라도 신용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카드빚 엄마가 내준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활동세대들은 자산이 거의 없다시피하며, 특히 현금성 자산이 거의 없다. 이미 빚내서 아파트나 사서는 아직도 빚 갚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젊은 세대들에게 닥친 새로운 고용감소의 물결로부터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 자산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담보대출을 갚고 난 뒤에 그 것이 주어진다하여도 정작 그 것의 가격이 지지될지는 전혀 장담할 수가 없다.
이미 그러한 지점에서 닥치고 내가 죽을때까지만 이라는 기성세대 새끼덜과는 전망이 완전히 어긋난 것이다.
제레미러프킨의 말대로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경제활동포기인구가 10프로대라는 것은 상수가 된 것이고, 그들은 순전히 어떻게 해도 풀타임잡을 얻을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그가 가진 인지부조화를 조금은 지적하자면 줄기차게 노동력이 부족해서 부족한 노동력을 노예노동력으로 공급받으려 하였던 신대륙의 역사와는 다르게 구대륙에서 노예제는 노동력을 공급하는 시스템이었다기 보다는 부랑아나 쓸모없는 것들을 감금하고는 가둬버리는 용도의 제도인 성격이 더 강하였다.
이를테면 악명높은 바르바리해적들은 수백만명의 그들에게 납치된 노예를 야기하였는데, 아주 특수한 수요로 팔려나가기라도 하는 종자들을 빼고 나면 나머지는 케이지에 갇힌채 뒤지는 처절한 운명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제라는 놈은 총기의 발달로 고정급여를 받는 엘리트 병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패러다임이 도출되자 아예 대놓고 이러한 쓸모없는 놈들로만 편제된 군대를 만들어서는 사회의 부랑아 새끼덜을 싸그리 전쟁터에 집어 쳐 넣어버렸다고 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베리 린든이라는 것에서 그러한 군대에 끌려가는 아이리쉬라는 기구한 운명이 조금 묘사된다.
중국과 한국에도 그러한 종자들은 항상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인간이 부족하였던 신대륙이나 호주정도를 뺀다면 되려 산업화는 그러한 종자들에게 나름대로 효용을 부여하였지만 그 역사적 경제적 사명을 지금은 다한 것이다.
즉, 미국과는 다르게 구대륙에서는 이미 이 것은 평균으로의 회귀에 가깝단 것이다.
애초에 아메리칸 드림으로 규정되었던 그 것조차도 구대륙의 입장으로 보면 청조나 일곱황제의 전쟁(1차세계대전) 요지랄할 때부터 이미 널리고 널렸던 무쓸모였던 인간들을 미국이 대거 싹쓸이 해간 것이다.
다만 현대자본주의에서는 이들의 소비기능이 중시되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업경제내에서 무화과와 포도와 블루베리가 더 잘 소비되었다고도 하는 자명한 진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끝내는 결과적으로 본다면 무쓸모인 종자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경제는 지주나 자본가들에게도 손해였던 것이다.
근세경제는 이러한 부분들의 잠재력을 잘 발굴하지 못하였다고 밖에는 말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반면에 희소성의 문제에도 봉착할 것이다. 즉 어느 시기에건 그 모든 계층에게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공급되는 시절은 있었냐고도 반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극심한 부분은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푸드 데저트 현상이 가장 극심하다. 미국의 어떤 하류들은 거의 1년내내 그린푸드나 프루트를 전혀 섭취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은 그러한 생산물들의 잉여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임에도 말이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의 하류들은 한국에서는 인간사료라고 불리는 탄수화물 덩어리와 본질적으로 별반 다를바 없는 음식만 평생 먹고 산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의 가장 근원적인 agricultrure한 부분자체가 대단히 열화되어 있고, 끽해야 쌀이나 밀가루와 같은 노동자의 칼로리보급용인 그리고 부가가치도 낮은 것들의 공급에나 치중하고 있으며, 일본의 농부 병;신새끼덜은 문명자체의 식단을 풍성하게 하면서 자기자신의 부가가치도 높일 수 있는 수단들이 공급되는 것에 그닥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러한 하부구조로부터의 인지가 나아가서 도시민들에 대한 복지나 형평에 대한 인지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에도 한국인들은 삼시세끼는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일본은 바로 그 한국과 접하게 된 임진왜란 이후에야 밥을 세번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 전의 일본인이라는 것은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석기시대적인 채집, 수렵의 요소가 매우 강한 미개인이었던 것이다.
마치 일본만화 베가본드에서 새알이나 훔쳐서 먹고, 고기잡아 먹고 그 지랄카는 신멘 다케조같은 상태인 놈들이니 문명화된 식량인 쌀은 두번만 먹어도 족하다 요 지랄인 장수를 위해서 소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신석기 미개인과 농경사회인의 중간상태인 병신이라서 위장을 비우고 다니는 수렴채집인인 한갓 미개인인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경우에는 미개인 속성이 매우 강한 회수 이북의 북방계와 회수 이남의 남방계가 있었는데, 북방계는 뭐 말이나 타고 댕기는 미개인이지만 남방계의 경우에는 제법 농업생산이 흥한 지역의 인간들이라서 그래도 먹고 사는 것에 대한 형편에 대한 기준은 있었다고도 칸다.
특히, 중국인들은 아주 옜날부터 그래도 인간이면 돼지고기랑 닭고기도 조금은 먹고 살아야 된다는 의식정도는 있었으니까 19세기의 청조만 하더라도 전세계 GDP의 30프로를 차지하던 군사기술은 미개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강국이었던 것이다.
요컨데 앞으로의 미래에서 실업을 단지 기술적 실업으로만 보는 제레미 러프킨과 같은 관점과는 다르게 그들은 전적으로 부랑아급으로 배제되는 무브먼트도 무시못할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어디까지가 최저이고, 어디까지가 지지되어야 하는 선상인지는 정책도 아니고 어쩌면 형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문화적 인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새끼덜이 가장 안 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형편에 대한 기준이 최저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공급과 수요에 관한한 상호작용을 고려해보면 이미 완전고용이 상식적이지 않은 사회에서의 총수요는 즉 최저가 어디까지냐를 결정짓는 것은 인지 그 자체가 결정할 것이기에 결국에는 인지로 말미암아서 가지고 있는 시장의 포텐셜을 undermine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일 것이다.
가쓰오부시에 최저가 콩나물이나 쳐 넣은 것에 밥만 말아먹어도 감사한 줄 알아라 요 지랄카는 나라와 인간이면 그래도 돼지고기 3식중 1식은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문명인들은 결국에는 그 수준에 맞게 재화의 분배와 공급이 고착된단 말이다.
물론 후자라고 해서 그 것이 고용을 딱히 창출하지는 않는다. 되려 농민들의 경우에는 완전히 편할 수 있는 최저노동상태보다는 이런 저런 복잡한 태스크가 발생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후자에서는 그나마 수요가 지지되는 편인 되는 것이다. 고기는 돈 있는 놈이나 먹어도 된다고 여기게 된다면 그 시장또한 그에 걸맞게 줄어드는 것이다.
즉 중요한 지점은 과거의 공급주도 경제와는 다르게 시장이 스스로 시장의 규모를 지지하지 못한단 말이다.
과거였다면 시장이 잘 되면 고용을 창출하면 수요도 창출된다고 하였지만 이제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이미 정책내로 흡수되게 되었을 때에 정부나 준정부기관이나 공기업 따위는 그 것의 지속가능성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고 말이다.
예를 들면 제주도의 광어양식업에 대해서 제주도가 신경쓰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 행위자체는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의 광어소비시장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초소득을 어디까지 지지하게 되느냐의 문제 또한 궁극적으로 에스닉한 인지범위내에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전쟁따위로 대규모의 제네레이션 단절이 벌어지는 학살이 아니라면 상식적인 지속가능성과 기득권의 차원에서 이를테면 2200년의 한 제주도 공무원의 수기에서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는 이 땅에 광어양식이 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고용이 줄어드는 시장추이에 의해서 광어양식도 점차 사양산업이 되더니 지금은 거의 소멸해서 일부의 고급수요에만 대응하는 몇개소만이 남아있다.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일자리를 가진 놈들만의 소비로만 전적으로 공급에 대한 수요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그리고 동정심이나 컴패션의 차원에서 이거 개백수들도 좀 먹어야 애초에 이 지역 양식업의 규모가 일정수준을 유지된다고까지 할 수 있지.
그리고, 한국은 애초에 많은 종자들이 한국에서 나왔다고 하는 보이지 않는 농업종주국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애초에 농업경제내에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치중하지 않았냐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종특에 의해서 한국의 농민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작물을 연구하고, 또한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종자은행의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일본에는 별반 종자가 없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정말로 많은 종자들이 나왔다고 한다.
즉 여기서 가장 근원적인 agriculture한 욕구가 어떤 식인지 깨닫겠냐는 것이다.
어쩌면 조선조적인 농본지대계라는 것도 종자은행에 한국산 종자들을 많이 우겨넣었던 자명한 것으로부터 나온 종특을 강점을 극대화하자는 이념일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작물들이 소비되게 하려면 누군가가 먹어줘야 하는 것이다. 요컨데, 가장 이타적인 것이 가장 이기적인 것이 된다. 어쩌면 시장경제의 발전 이전에는 한국인들의 그러한 열정은 조상에게 감사하고, 왕실에게 충성한다는 개념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시장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상품성 작물의 재배에 관한 욕구도 증진되었다.
마찬가지로 지중해 경제에서도 무화과와 올리브유와 포도라고 하는 지중해인들이 생각하는 생계의 최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문화이념에서 도출된다.
요컨데, 개백수도 포도주는 마시고, 대추야자를 무화과 정도는 좀 먹고 살 수 있다는 농경문명적인 베이스인 것이다.
한국의 농경문명에서는 근자에 여기에 미국적인 육류생산이 가미되었다. 그 것은 신대륙에서 넘어온 신작물인 옥수수의 영향도 지대하다.
옥수수는 사람이 먹는 것보다 소가 먹을 때에 소화효율이 더 좋은데, 뭐 한마디로 소키우기에 좋은 사료원인 것이다.
하여간 최저로 먹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하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문명이라면 그 나라의 고용수준까지도 그에 걸맞게 후퇴할 것이다. 완전고용까지는 물론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시장이 있기에 축산업자도 존재하고, 양식업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의 소사육두수는 251만두임에 반해서 한국의 소사육두수는 무려 360만두이다. 이는 인구수에 비하면 대단히 차이나는 숫자이다. 일본의 인구는 1억2천만이지만 한국은 불과 5천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경제적인 것보다는 어쩌면 문화적인 최저에 대한 관념이 곧 시장규모를 결정하였다.
차라리 진정한 공급주의적인 입장에서 한국의 소사육두수가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고기를 먹어야된다. 어쩌면 직업의 유무나 귀천과 무관하게 말이다. 요컨데, 쳐 먹어야 기를 수요도 생긴단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고전적인 경제학은 경제가 잘 되면 고기 먹는 놈도 알아서 늘 것이라고 했지만 현대에는 더 이상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 메카니즘으로부터 전통적인 수요-공급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아베와 스가와 같은 작자들이 제시하는 해법이라는 것은 중세적인 문화적인 기속을 이용해서 일본인들의 인지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요컨데 사회는 잘 못 없으니까 그냥 알아서 살어. 요런 것이다.
그 것은 그들 일본의 지배성분자체가 중세적인 혈투에 의한 방법으로 막부군을 격파하고는 열도의 지배권을 굳혔던 지배의 양태(modality)에 기인하는 것이다.
요컨데 사채군 우지시마에서 묘사되는 루저들, 집안에 인스턴트따위나 잔뜩 사놓고는 폐인이 된 새끼덜을 묘사하는 양태조차도 실상은 그 것을 묘사하는 놈이나 묘사당하는 놈이나 둘 다 쪽바리짓거리나 하는 쪽바리일 뿐이다.
그 것을 묘사하는 놈의 입장은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쳐 먹으면 당뇨나 탄수화물 중독이 오는데 왜 일본식 소식을 하지 않냐. 그러한 정신상태로부터 자기 관리가 되지 않지 않냐는 원망의 뜻이겠지. 그리고 너는 자기관리가 안 되니까 그 정도의 취급인 것이 당연하다 요 지랄도 포함해서 말이다.
씨발 고기 쳐 먹으면 되지 이 병신아. 근손실 안 일어날려면 고기를 먹어야제.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유투버가 말하듯이 일본의 하꼬 새끼덜은 월식비를 10만원이나 겨우 지출한다는 그지새끼덜도 널렸는데, 실상 그 누구도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한국이라면 10만원의 식비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 것이다.
한국에서 식비는 월50만이나 심지어 월100만원 써서 월세내고, 공과금내는 것 빼고는 다 먹어조진다는 놈도 간혹 있는 수준이다.
어쩌면 일본의 살인적인 공과금이나 교통비나 심지어 기록적인 거품폭락조차도 밥도 안 먹고, 공과금이나 쳐 내게 되는 것 자체가 문화적인 양태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거품 붕괴에 있어서도 그 병;신새끼덜은 밥 안 먹고 아낀 돈으로 집투기, 주식투기해서 다 날린 것이다.
밥이라도 제대로 챙겨 먹고, 집투기를 한 것과는 뭐가 달랐냐면 거품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틀렸을 정도로 비정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경직된 구조와 기성문화를 답습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지배계급 때문에 정신상태가 안 바뀌는 것이다.
요컨데, 일본은 역시나 인문적인 수준은 중세교회사회와도 같은 규범사회인 것이다.
일본새끼덜은 양키적인 햄버거 문화도 그닥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국의 돼지고기 많이 먹는 문화도 그닥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한 것으로부터 돈을 잘 버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화적 빈곤이 초래되었고, 그 것이 나아가서 경제적인 수요와 공급과 생활수준과 복지에 관한한 최저에 대한 인식의 미비를 초래하였다.
한마디로 돈 많이 벌어봤자 거지새끼 근성을 전혀 못 버린 것이다.
스시 그 것도 마치 인도거지창년이 루이 뷔통 들고다니는 것과 같은 거지새끼근성이에요. 기본이 안 된놈이 똥폼만 살은 것이지.
뭐 클럽에서 보빨 함 할라캐도 갑바가 있어야 될꺼 아이가. 갑바가 있으려면 단백질을 섭취해야지. 그런데 고기 먹을 돈은 없다. 플레이크라도 먹어야제.
그런데, 스시라는 것 아주 엉터리 식품 아니냐? 차라리 삼겹살만 밥없이 사서 구워먹는만 못하다. 한국에서는 노가다새끼덜도 그런 생각은 하는데, 기본이 없다는 거에요. 스시는 그냥 최악의 도시빈민새끼덜같은 상술만 극대화된 뭐 갸들말로도 가장 상업적인 레시피라고 하니까 엉터리 허당이 맞다고. 음식의 기능은 일단 첫째가 영양섭취 아니냐고. 생선 한마리 통으로 다 쳐 먹어도 배고플 수도 있는데, 그걸 조각조각을 내서는 그 지랄을 하냐 씨발 조까튼 놈들.
마찬가지로 통합당 새끼덜도 유교이념이나 혹은 그것에서 대체된 기독교이념과 같은 중세적인 관념으로나 쳐 다스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서울 하류새끼덜 개독믿는 새끼덜에게서 또한 도출되는 아주 더러운 냄새가 하나 있는데, 바로 청국장이다.
요컨데, 청국장과 스시가 국민의 짐당과 일본자민당인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지방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기인한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뭐 아는가 모르겠는데, 광주나 부산이나 마산 인간들은 청국장을 먹지 않는다.
전혀 우연의 일치같지만 그들이 세뇌하고픈 규범적인 문화통치의 식문화의 단견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차라리 본디는 경상도에서나 먹던 전어먹던 문화가 서울인들에게도 퍼졌다면 모를까 청국장 사 먹는 경상도인인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라도 식문화인 꼬막도 지금은 서울놈들도 잘 쳐 먹겠지만 역으로 청국장이 그쪽으로 건너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유학, 개독이라고 함은 청국장이 개지랄을 한다고 묘사하더라도 죄다 알아들을 수 있다. 청국장 그거 콩단백질 좀 섭취하자는건데, 양적으로 말해서 한끼에 고기1인분인 150그램 먹을 수 있냐? 구역질이 날꺼다 씨발.
그걸로는 노가다 근손실에 대한 단백질 섭취 안되지 씨발. 조금 단백질 몇 그램정도 먹는거지. 소금이 한끼에 25그램정도 먹어지면 많이 먹는 셈인데, 그 정도나 겨우 먹는것이지.
차라리 삼겹살 300그램 굽는게 낫지.
전광열이도 청국장새끼지 뭐. 어후 씨발 구역질난다 조까튼거. 나는 청국장이고 낫토고 지랄병이고 조까치 싫어한다. 솔직히 살면서 별로 먹어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소싯적에 JAL 타니까 낫또 쳐 주던데, 맛대가리 조깥았다.
일본은 스시신토이즘 중세국가로 유지하려는 놈들이 극우새끼덜이고, 한국을 청국장 개독 중세국가로 만들려는 청국장인서울 엘리트주의에 귀속시키려는 놈들이 통합당 새끼덜이라는 것이 단지 오해이겠냐고?
뭐 조계종 봉은사도 청국장 땡중이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들에게는 청국장이 패러다임이겠지만 지방놈에게 청국장은 문화상대주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수도는 청국장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관습법적 위헌선언을 한 것이 또한 헌재청국장새끼덜이고 말이다.
아니 청국장은 니덜만 쳐 먹는 관습이지 이 개;새끼덜아.
그러한 의미로 재해석한다해도 할 말없는 이노무 나라는 청국장버러지가 장악한 인서울전제주의국가인 것이다.
아 물론 햄버거와 돼지고기는 쪽바리것들보다는 더 잘 받아들인 융통성은 있었지만 말이다. ㅋㄷㅋ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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