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이 월북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전에 그가 월북을 하게 된 이유부터 집어봐야지요..
광복이후 미군정 군정 고문 대부분이 일제시대 경찰로서 동족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자등 중 80% 이상이
미군정으로 경찰에 다시 기용되었습니다.
이에 김원봉은 미군정 노덕술에게 잡혀들어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여론이 악화되어 증거불층분으로 풀려나고나서
자택이 습격당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그와 함께 의장단에 속했던 사람이 박헌영 백남운 여운영 허헌인데. 영운형은 암살당했고...
나머지 3명은 쫒기듯이 월북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기원봉이 월북이전에 중경 활동당시 비서로 지내던 사마로에게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
라는 편지를 보낸것을 보면 그가 자의로 월북을 하게 된것이 아님을 어쩔수 없습니다.,
비판을 해야 된다면 그당시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득세 하게했던 그 세대를 비판 하여야지요.
저로서는 목숨을 바처 독립운동을 하였고 일본이 패망하였음에도.
그들이 정권을 잡고 득세하하며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야 했던 그의 사정에 처참하기 까지 합니다..
북한에 넘어가서도 그는 김일성이 전쟁을 준비할때 한 민족이 피를 흘릴 것을 걱정하여 전쟁을 반대하였고
납북된 중도파 정치인을 만나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했습니다.
그에 반해 남한은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까지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문당하자 살해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배되어 굶어 죽였습니다.
기원봉 또한 결국 김일성의 정권아래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을 당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는 일본과 분단의 희생자이며 피해자이기도 하고
월북은 하였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몸은 북한에 있더라도 한반도전체의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자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역사를 보면 그를 북한으로 갈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것은 자한당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분명 자한당은 4년전 그가 나오는 영화를 긍적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 자한당이 이제와서 기원봉을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도 뻔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내용들은 언론에 나오지 않습니다....
언론에서 김원봉을 다루는 것을 보면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북한으로 월북하였고
그가 북한의 충실한 하인인 것 마냥 나오고 있습니다.
유튜브 블로그 까페 실시간 반응을 살펴봐도 그에 대한 내용은 빨갱이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파도에 쉽게 흽쓸리고, 간편한 것을 선호하면, 쉽게 잊습니다...
그의 역사 전체를 알고 자 하는 것보다 월북 빨갱이라는 단어가 간편하고 알기 쉽습니다..
유튜브만 봐도 그들이 운영하는 극우채널만 500개가 넘어가고,
그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와 가입되있는 까페들도 수백개가 넘어가지요..
사람은 파도에 쉽게 휩쓸립니다. 처음에 아니라고 생각해도 수백명이 모두 맞다고 하면
결국 생각을 바꾸지요.
그리고 자신의 이념과 이득의 편의를 위해서 지식을 편식하고 잊는 것 또한 사람의 본성입니다.
현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거 아닌가 싶습니다.
지지자들은 각자의 생활이 있고 그들처럼 영상을 만들고 하루에 수천개 싞 글을 적어낼 수 없습니다..
결국 청와대와 여당에서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을 해야하는데..
이러한 모습들이 너무 보이지 않는 것 처럼 보이네요..
1945년 10월 10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충칭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거행하고, 국내외 각 민주당파와 민주영수를 단합하여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당면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였다. 그 해 12월
김규식, 김원봉, 성주식,
[13] 김상덕은 중앙대표단의 명의로 환국하는 동시에 당 중앙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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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일에 찍은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서있는 사람이 김원봉이다. |
김원봉이 귀국한 당시인 1945년 12월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미국과
영국, 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일제가 패망하고 그 점령지역에 대한 관리 문제를 가지고 거의 열흘이 넘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문이 발표되었는데 일제의 통치를 결산하고 한국의 본토를 독립국가로 재건하는 데 있어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임시로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신탁통치 오보사건[14]으로 인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과 찬성하는 좌익의 거센 충돌이 지속되었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12월 30일에 포고령을 내려 전 국민 파업을 지시하는 등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벌였는데,
[15]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기용된 친일파들
[16]은 신탁통치 찬성파들이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반공투사', '애국자'임을 자처하면서 우익세력의 뒤에 숨어들었다. 찬성파들은 1946년 1월 3일 서울에서는 10만여 명이 모여 ‘조선자주독립 민족통일전선결성촉성 시민대회’가 열렸고 3상 회의의 합의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표명됐다.
좌익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에서 활동한 김원봉은 신탁을 반대하는 행위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여 비판했다.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 1946년 2월 14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공동의장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은 6월 말 김원봉을 위원장, 성주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고,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원봉은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하는
조선인민당 당수였던
여운형을 도와 나섰다.
[17]그래서
1946년 6월 27일에는 김규식과 좌우합작 문제로 회담하였으며, 7월 중순 인민공화당에서 '좌우합작에 관한 4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대구 10.1 사건이 발발하자, 민전 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대구,
부산 등 경상남북도 일원을 방문했다.
이로 인해 사건의 배후로 몰려 10월 21일 성주식과 함께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기도 했다.# 이어 공공연한 협박은 물론 백색테러 위협까지 받자 중국에서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해야만 했다. 강준만에 의하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1947년 3월 22일 김원봉은 미군정청 경찰이었던 노덕술[18]에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된다. 그때 노덕술은 그를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모욕을 주고 그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19] 그렇게 김원봉은 중부경찰서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게 되었고,
[20] 이에
김원봉의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어 4월 5일 조선건민회의
이극로가 자유신문에 '혁명 애국투사 천대는 우려사(憂慮事)'라는 제목의 글을 실기도 했다.
# 그래서
4월 9일 미군정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김원봉을 무혐의로 석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4월 9일 당일 김원봉이 아직 철창 속에 있는 동안 두 번째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철근'이라고 지었다.
민족자주연맹 대표였던 송남헌
[21]이 쓴 『해방 3년사』에 그때 상황이 나온다.
김원봉을 붙잡아 간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이었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살해됐는데 장택상은 이 원한 때문에 '진보적 해외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는 설이 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 하고 입에 밴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하늘 같은 청장님이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야! 정중히 모셔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라고 했나?" 그러면서 짐짓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수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정치적 노선 차이로 김원봉과 거리를 뒀던 임시정부 계열의 정정화조차 자신의 책 『장강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언젠가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의열단의 의백이었고 민혁당의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김원봉은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의 집에 찾아가 꼬박 사흘 동안 울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그의 독백은 울분으로 이어진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 『역사에 다시 묻는다』 (길진현, 삼민사, 1984)
1947년 7월에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구실 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규탄과 함께 그의 죽음을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규정하며 여운형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했다. 그리고 '광명일보'와 '노력인민' 등 좌익 계열의 신문들에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좌우 대립의 상처는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급기야 8월 2일, 미군정은 제5호 행정명령을 발동, 민전의 8.15 기념 시민대회를 금지시키고, 8월 11일에는 민전을 비롯한 좌익 단체에 대한 폐쇄령과 좌익 인물에 대한 일제 검거를 단행했다. 그러자 8월 12일에는
자택이 습격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래서 민전과 인민공화당의 사무실도 폐쇄해야만 했다.
사실
광복 후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좌익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단 일원이었던 그가 좌익을 탄압하던 미군정 하에서 무사하길 바라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참고로 그와 함께
의장단에 속했던 사람이 박헌영, 백남운, 여운형, 허헌이다.
암살당한 여운형을 제외하고
나머지 3인은 모두 47년 말에 월북하였는데 김원봉은 그래도 반 년 이상 남한 지역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으니 생존력이 대단했던 셈. |
남북연석회의에서 단선 단정 [22]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이다. |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3월 김원봉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김원봉이 광복 후 남한 지역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박헌영,
이극로 등과 함께 남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협상에 참가하였다. 이때 남북연석회의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기도 하였고, 연석회의 전체의 사회를 맡기도 하였다. 그 뒤로 그는 북한 지역에 머물렀고 더 이상 남한 지역에 내려오지 않았다.
다만
월북 이전에 김원봉은 자신이 중경에서 활동할 때에 비서를 지냈던 사마로(司馬路)에게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월북이 어쩔 수 없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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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운데가 수상 김일성, 왼쪽에 선글라스 낀 인물이 국가검열상 김원봉이다. |
두 달 후인 1948년 6월 29일부터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하였고, 8월에 진행된
북조선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에서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9월 9일에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 1948년 11월에는 "미군은 물러가라"는 규탄 성명에 참여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고 군사력도 부족했지만, 북한에는 240여 대의 소련제 탱크와 수십만의 중국
팔로군 출신 조선족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1949년 김일성은
전 조선을 공산화하여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다니며 전쟁승인을 받으려고 여러 차례 소련과 중국을 찾아다녔다.
1950년 4월 하순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전쟁에 대해 동의를 얻었고, 5월 13일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에게도 남침에 대해 동의를 얻었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고, 설령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기 전 최대 2개월 안에 적화통일을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김일성에게 김원봉은 두 달의 짧은 기간 만에 남쪽을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세력이 약한 대한민국을 도와 미국이 참전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오랜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이득 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 것이라며 전쟁을 반대하였다.[23] 가족이 대한민국에 버젓이 있었던 김원봉으로서는 남침에 반대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주장을 묵살한 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남침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비극은 김원봉의 가족에도 들이닥쳤다.
전쟁 도중 이승만 정권의 대대적인 보도연맹 학살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하거나 살해되었다.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는데, 김학봉은 물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 그의 아버지 김주익도 유배되었다가 굶어 죽었다.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에는 "미제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에 반대하는 조국 해방 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김일성에게
노력 훈장을
받았다. 5월에는 내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 휴전 이후의 1953년 11월에는 납북된 안재홍, 엄항섭, 조소앙, 조완구 등 중도파 정치인들을 만나 이들과 함께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1954년 6월 이들의 대표로서 조소앙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립화 통일방안은 우리 조선의 장구한 역사적 경험과 교훈, 그리고 오늘 우리 조선이 처해있는 상황으로 보아 외부세력의 침략과 간섭을 배제하고 잔정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중립화만 보장되면 외부세계의 침략과 간섭은 없어지고 나라의 평화도 보장되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고 통일위업 달성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조소앙.
1956년 7월 19일에
박헌영이 총살형에 처해지고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그해 8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부수상 등
연안파가 '반(反) 조선로동당·
반혁명 분파'로 몰려 숙청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9월에는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김원봉은 조선로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군소정당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확인되었다. # 동명이인 김원봉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24]1958년 3월에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김두봉도 숙청당하였지만 김원봉은 당시에도 건재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면서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다.
남침을 반대한데다 납북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도와주며 이들과 함께 평화통일을 주장해서 김일성의 눈 밖에 났었던 김원봉은 1958년 11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
[25][26] 이후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북한 정권은 극비에 붙이고 있어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김원봉이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므로, 당시 교장이던 장제스와
사제관계였다. 무엇보다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만큼,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한 이력까지 있었다. 그것도 군관학교 교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도 중국 내 백색테러를 주도하던 국민당
남의사의 지원을 받던 단체였는데... 그 남의사의 총수 등걸이 김원봉의 군관학교 동기였다. 등걸은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고위직을 역임했다. 등걸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과 군관학교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지원은 물론이고 잦은 연락을 가졌다고 한다. 김일성으로선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붙여 뒤집어 씌우기 너무나 좋은 이력을 가졌던 것이다.
[27]김원봉의 마지막 생은 숙청으로 사라졌지만,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의 일기에는 그의 죽음에 관해 다른 이설도 내려져 온다.
4년 전엔 '만세삼창'...지금은 '빨갱이'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