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스무살에 결혼했다.
그리고 스물 일곱에 이혼을 했다. 일곱살짜리 외동아들. 나라는 짐덩어리를 떠안고.
아빠가 사라지고, 나는 방 세칸짜리 빌라에서 엄마와 내가 둘이 누우면 꽉 차는 크기의 작은 방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래도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내라고 하는 급식비나 공과금도 밀린 적 없었고, 엄마가 일하던 식당에서 가져온 반찬이지만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힘들지 않다고 느낀 덕분에, 엄마는 두배로 힘들어야 했다.
새벽 다섯시정도에 내 아침밥을 차려놓고 일하러 간 엄마는 저녁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으니.
오전에는 함바, 오후에는 고깃집에서 일을 하며 손가락이 퉁퉁 붓고 갈라져도 쉬는 날 없이 일해야 간신히 엄마와 나, 두명이 한달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겨울, 기름값이 없어서 보일러를 땔 수 없는 날이 있었다.
일하고 돌아온 엄마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나를 보고 물병에 따뜻한 물을 담아 건네셨고, 나는 등 뒤로는 엄마의 체온을, 앞으로는 물병의 온기를 느끼며 힘겹게 잠들었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계속 물을 끓이며 내 품 속에 물병을 갈아주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모범생이 되어야 했다.
아무도 강요하진 않았다. 심지어 엄마도 나에게 공부하란 말을 하신적이 없다. 내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와도 실망하시거나 꾸중하신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부해야 했다.
그냥 깨달았다. 엄마가 무엇때문에 저렇게 힘들게 사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대학을 들어가고, 군대에 다녀 온 뒤에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 병무청에 아버지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사실, 난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이 어릴 때는 막연한 미움이었다면, 대가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확고한 증오심으로 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지 않으려 했다. 연락도 하지 말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엄마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 했다.
많이 고민했다. 이해하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스물 일곱살의 아내와 일곱살짜리 자식을 두고 가서 단 한번도 연락한 적 없던 인간이 무슨 염치로 이제와서 나타나는건가 싶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용서하려고 했다.
이십여년만에 만난 아버지는 행복해 보였다.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딸도 낳고 잘 살고 있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새 가족에게 나를 소개하던 자리에선 진심으로 내가 여길 왜 왔을까 후회했다.
결국 자고가라 붙잡는걸 뿌리치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술을 마시고 계셨다.
돌아온 나를 보며 엄마는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나고, 나를 낳고, 고향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다단계를 하게 되고, 천만원 가량의 빚을 지고 그것때문에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일주일 뒤, 나는 다시 아버지를 찾았다.
그리고 소주와 새우깡을 놓고 마시며 이야기했다. 긴 이야기였다. 중간쯤부턴 술에 취해서 제대로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아버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때 엄마와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당신이 천만원에 내팽개친 가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두 말했다.
난
아버지가 미안해하길 바랬다.
여전히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순 없지만, 용서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젊은 청춘을 그렇게 힘들게 보내야 했던, 지금 내 나이 또래였던 그때의 엄마를 위해서. 싸구려 동정이 아닌 진심이 담긴 후회와 죄책감을 가지길 바랬다. 그랬다면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변명했다. 모든건 엄마가 잘못한 거라고 했다. 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영혼으로 이어진 인연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이제부터 내 아버지가 아니다.
당신이 죽기 전 까지, 아니 죽는다고 해도 나에게 연락할 생각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나왔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까닭없이 눈물이 터졌다. 쪽팔린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울었다.
그 뒤로, 몇번인가 전화가 왔었다.
차단하니 모르는 번호로, 또 모르는 번호로.
그때마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라고 차갑게 이야기하며 끊었다.
한달 쯤 지나자, 다시는 그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
오늘 상사가 물었다.
"어버이날인데 집에다 안부전화는 했나?"
질문을 듣는 순간, 그의 번호가 떠올랐다. 왜 이런 날 떠오르고 지랄이람. 하필, 번호도 쉬운 번호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