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李明博,약칭 MB, 1941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기업인, 정치인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 학생회 간부를 지냈고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6·3 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에게 발탁되어 30대 초반에 이사를 지냈고, 현대건설의 평사원 출신으로 회장을 지냈다. 14대(민주자유당 비례대표)와 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1996년 5월 30일 - 1998년 2월 21일)과 32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으며, 2007년 12월 19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일제강점기 오사카 부에서 출생하였으며 광복 직후(당시 만 3세) 귀국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 왔다. 본관은 경주(慶州) 이다.
목차 [숨기기]
1 약력
1.1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1.2 학창 시절
1.3 고려대 재학과 6.4사태
1.4 현대건설 시절
1.4.1 자동차 개발
1.4.2 선박 제작 참여
1.5 정계 입문
1.6 서울시장 시절
1.6.1 청계천 복원
1.6.2 대중교통 체계 개편
1.6.3 기타
1.7 BBK 공방
1.8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1.8.1 권총 협박 사건
1.9 대통령 취임 이후
1.9.1 취임식
1.9.2 지지율
1.9.3 대통령과의 대화
1.9.4 주요 정책
1.9.5 청계재단 설립
1.9.6 대한민국 외 국가의 평가
1.9.7 글로벌 외교
2 비판과 의혹
3 역대 선거 결과
4 전과 기록
5 프로필
5.1 학력
5.2 주요 경력
5.3 상훈
5.4 저서
6 가족 관계
6.1 혼맥
7 함께 보기
8 주석 및 참고자료
9 바깥 고리
약력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이명박은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던 1941년 12월 현재의 일본 오사카 부 오사카 시 히라노 구에 해당하는 일본 제국 오사카 부 나카카와치 군 가미 촌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1] 이충우와, 채태원의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2] 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의 성은 쓰키야마(月山,~1945년)이었다.[3] 일제감정기 시절 그의 가족은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귀국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 왔다. 형제 둘을 잃었으며, [4][5] 원래 호적에 올라 있던 이름은 상정(相定)이었으나 후에 명박(明博)으로 바꿔 올렸다.[6][7] 경북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가 터졌는데 미군의 폭격에 바로 위의 누나와 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살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워야 했다. 그 때문에 학교선 “술 냄새 풍긴다”며 구박을 받기도 했다. 살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러 다녀야 했다.[8]
만 3세의 나이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일제감정기 시절 일본식 이름을 가진 전적 때문에 이명박에 비판적 성향을 가진 누리꾼들은 일본에서 살 때의 사용되었던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9]
자녀로는 딸 이주연(1971년), 이승연(1973년), 이수연(1975년)과, 아들 이시형(1978년)이 있다.[2]
학창 시절애초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의 설득으로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닌다는 약속하에 동지상고(현 동지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아 졸업하였다.[10][11] 그 후 19살 되던 해 서울로 가서 1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독학을 하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지원하여 합격했다.
고려대 재학과 6.4사태박정희 정권때 고려대학교 재학 중 학생운동권의 리더로 활동했고, 상과대학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6·3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아침 청소부 생활을 하여 학비를 조달하며 졸업하였다.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으나, 그는 훈련소에서 신검을 받다가 기관지확장증 판정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6·3데모를 주동했지만 계엄령 이후 도피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신문 공고가 나오고[12]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12] 이명박은 이때 시위에 참가한 일을 그때 일본과 국가정상화를 할때 '너무 서두르지 마라,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다" 고 2008년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말하였다.[13]
현대건설 시절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대기업이나 공무원 등 각종 공직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 를 규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박정희에게 전달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편지 발송 후 대통령 비서진이 찾아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고 그는 현대건설에 취직할 수 있었다.[14] 그는 면접에서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4]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1970년 김윤옥과 결혼해 1남 3녀의 자녀를 두게 된다. [4]
입사한 지 2년차에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입사 12년 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30대에 현대건설 사장이 된 이 대통령은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고 그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15]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한국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또한 1990년~1991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Gulf-War)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 탓에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16] 현대 건설은 이후 워크 아웃을 조기에 졸업하여 시공능력평가 1위 자리를 다시 되찾았다. [17]
1992년 대선 시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의 출마와는 반대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현대 정주영 일가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현대가와의 '화해'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분석도 있다.[18]
자동차 개발그는 2009년 8월 28일 나로우주센터에서 연구원들을 격려하며 "내가 젊었을 때 대한민국 자동차를 처음 개발했는데 자동차 부품이 2만3000개나 된다. 첫 자동차를 만드는 것도 그렇게 힘이 들었다" 라고 말해 자동차 개발에 참여하였음을 밝혔다.[19] 언급한 시기와 대한민국에서 개발된 자동차의 기술적 수준에 비추어 볼 때 그가 현대건설 재직중인 1975년에 출시된 현대 포니 1세대 모델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출처 필요]
선박 제작 참여그는 2010년 4월 1일 남미지역 특사를 맡은 한나라당 의원들과의 오찬에서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잘 아는데 배가 두 동강이 났다는 것은 뭔가에 의해 들어 올려져서 가장 약한 부분에 충격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배의 노후성 때문에 이렇게 두 동강이 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라고 말해 선박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밝혔다.[20] 선박구조공학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발언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현대건설 재직중 현대중공업에서 선박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출처 필요]
정계 입문1992년 정주영 회장과 결별하고, 그는 민자당후보로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 등으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았다.[21][22] 그는 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을 벌였다. “경선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주장해 경선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패했다.
그 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7억 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 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23]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국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24]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후에 이 의원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궐선거로 차지하게 된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 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25]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26] 1999년 4월 대법원은 이명박의 범인 도피 혐의에 대한 유죄를 확정했다.[27]15대 재선 의원 때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4]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LA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많이 든다고 지적하며 500㎞ 길이의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의 출발점인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14]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청계천 복원 공사 현장에서 브리핑하는 이명박(2005년 6월)의원직을 상실하면서 큰 좌절을 겪은 이명박은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에 선출되면서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되었다. 사람들에게 청계천 복원 등 주력사업을 추진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명박이란 이름을 각인시켰다. [4]
청계천 복원32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취임 직후 복원 작업에 착수,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얻어내 5.84㎞의 청계천을 복원하여 청계천을 시민 문화 시설로 변화시켰다. [28][29] 타임스는 복원된 청계천이 마치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도심의 흉물로 철거 대상이었던 청계고가는 이 당선자 자신이 대표로 있던 회사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지적했다.[30] 청계천 복원으로 도심의 열섬현상이 차단되어 한여름 온도가 3~4도 내려가 오염물질이 줄어들었고, 맑은 물과 가로수, 산책로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인근 상권 및 생태계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31]하지만, 자신의 시장 재임 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다.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 물을 사용하게 하였으며, 발견된 문화재들을 파괴 및 훼손하고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32][33] 또한, 당초 예상보다 많은 연간 69억 6000만원(2005년10월 7일 서울시의회 청계천 유지비로 상정)의 유지비가 들어간다고 한다.[34][35] 복원 과정에서 문화유산의 훼손 및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상 문제 등이 지적되었다.[36]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 기소되었고,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37][38]
대중교통 체계 개편 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 티머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4년 7월 1일, 그는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때 신설된 교통카드가 티머니 교통카드다. 버스 중앙차로제를 실시하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고, 이용 요금은 교통카드의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에 비례하도록 변경하는 한편 준공영제를 도입하여 적자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 회사들의 손해를 보전해주었다. 버스개편의 결과 버스의 통행 속도가 빨라졌고 대중교통 이용객도 증가하였다. 중앙버스차로제도 그에 의해 생겨났다.[39]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 등을 이유로 이명박을 “환경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40] 새로운 교통 시스템이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도입 초기 혼란을 빚었다는 의혹과 준공영제 도입으로 말미암아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보전하는 데에 수천억의 예산이 사용되는 것 등으로 인한 비판도 있었다.
기타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그는 문화재 개방의 기조 아래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의 접근성을 높였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 사건 현장을 둘러보는 이명박(가운데)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종교적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서두르기 위해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어 AIG가 1조 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나 이 부분도 특검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41] 재직 당시 5조 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 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 측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42]
BBK 공방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그는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대한민국에서 금융 사업을 시작하였다. ‘LKe’ 라는 금융 투자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7대 대선 정국이 진행 중이던 때 그의 동업자였던 김경준과 그가 설립한 BBK의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김경준은 이명박이 BBK의 실소유자이며 이명박의 도장이 찍힌 이면계약서를 제출했고, 이를 토대로 사실상 이명박이 실소유자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측은 BBK연루를 부인하며 만약 사실이라면 사퇴하겠다며 맞섰다. BBK 주가 조작 사건은 사건의 당사자인 김경준이 선거에 즈음하여 귀국함에 따라 이에 대한 검찰수사가 대선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김경준이 귀국하며 가져온 이면 계약서 등 이명박이 BBK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로 제출되었다. 검찰은 종이의 재질 및 프린터 종류등을 감식한 결과 이것은 위조된 것이고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어 무혐의로 발표했다.[43]
하지만 정치권의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검찰 수사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혐의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일명 BBK 특검법)을 12월 17일을 주장했고 이를 이명박이 받아들여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특별검사의 수사가 이뤄졌다. BBK사건 뿐만 아니라 차명재산, 서울시장 시절의 특혜 의혹 등에 대한 이명박 특검법이 입안되어 특별검사의 조사가 이뤄졌다.
2008년 2월 21일에 특검은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광운대학교 강연과 이른바 ‘BBK명함은 제휴업체를 홍보해주려는 취지’였고, 동영상과 명함이 계좌추적 등을 통한 객관적인 정황을 번복할 만한 직접 증거는 안된다”고 밝혔다.[44] 이 수사결과에 의문을 갖는 국민들도 있다. 이명박에 대한 조사가 설렁탕집에서 간략하게 이루어지는 등의 부실한 조사 과정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며, 광운대 강의 비디오와 이명박의 이름이 찍힌 BBK 대표이사 명함 등의 증거를 무시한 특검의 판단 대한 비판 또한 있었다.[45][46]
한편 2008년 2월 11일 김경준의 누나인 에리카 김이 "주가 조작", "사문서 위조"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미 연방법원으로부터 유죄가 선고으나 이의를 제기했다.[47][48] 그때 에리카 김은 “동생 김경준의 불법행위에 가담한 사실을 덮어주면 수사에 협조하겠다”라며 검찰과 플리바게닝(유죄인정 형량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주장의 신뢰성에 타격을 받았다.[48][49]
결국 법원은 김경준의 주가조작 및 횡령혐의 대한 유죄를 인정하고 대선이라는 정치상황을 이용했다는 점이 좋지 않은 양형 요소로 추가돼 징역 10년과 벌금 150억원의 중형을 선고받았고, 이로써 대선정국을 요동시켰던 `BBK의혹'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50] 이렇게 한국의 법원에서는 김경준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으나, 김경준 및 에리카 김은 2월의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결국 같은 해 5월 29일 미국의 법원에서는 김경준 및 에리카 김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또한 다스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김경준 측이 승소하였다.[47] 이명박은 BBK의혹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으며[51] 한겨레는 2010년 5월 1일 2007년 8월 17일 BBK 보도에 대해 지면을 통해 허위주장을 보도한 것에 대한 사과문을 기재했다.[52] [53]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그는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러 2위인 박근혜 후보를 2,452표 차이로 누르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54] 당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박근혜에게 모두 패했지만, 전화상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앞지름으로써 승리하였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 후보가 승복함으로써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후보였으며,[55] 2007년 12월 19일 각기 26%와 15%의 지지를 받은 대통합 민주신당 대표 정동영 후보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49%의 지지를 받으며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8년 2월 25일 공식 취임하였다.[56] 대한민국 최초로 CEO출신의 대통령이라는 의의도 있다.
권총 협박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이명박 권총 협박 사건입니다.
2009년 12월 1일 이명박은 박근혜 의원에게 "나도 지난 대선 때 어느 괴한이 권총을 들고 집에까지 협박을 하러 와서 놀란 적이 있는데, 경호원들이 붙잡고 봤더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라고 말해 대통령 후보때 권총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57]
하지만 이명박의 최측근인 강승규 한나라당 의원은 "내가 알고 있는 내용" 이라며 이명박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 게 아니라, ‘주방 아주머니가 받은 전화에 “탕탕탕” 총소리를 내며 협박을 한 것’이라며 이명박의 진술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해 문제되고 있다.[58]
이에 대해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거짓말이 아니라면 분명 또 다른 권총 협박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권총의 행방을 추적해야 한다. 협박범으로부터 권총을 압수했다면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불법 무기소지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권총을 압수하지 않았다면 추후범행을 방조한 결과가 된다"며 권총협박사건의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59]
대통령 취임 이후 이명박 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취임식
2008년 2월 25일의 취임식 당시의 이명박 대통령2008년 2월 25일에 취임식이 ‘함께 가요, 국민성공시대!’ 라는 표어를 내걸고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엠블럼의 명칭은 태평고(太平鼓)인데, 이는 태평소와 북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희망의 울림소리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태평소는 음색이 매우 강하고 높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북은 가장 힘차고 박진감 넘치며 전진을 상징하는 악기라는 점에서 모티브로 채택했다고 한다.[60] 취임식에는 관련 인사는 물론 전체 4만 5000명의 참석자 중 2만 5000명을 일반 시민에게 신청을 받아 배정하였다.[61] 또한 푸른색 바탕에 동아시아 지도와 태극기 그리고 그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 취임 기념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지지율
2008년 4월 18일에 미국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명박 대통령투표자 중 반수에 가까운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이명박은 불도저라는 자신의 이미지대로 인재를 뽑고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50여개 품목의 물가 안정,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상 정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였다.[62] 그러나 정책 조율 등의 미숙함 등으로 말미암아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63] 한편, 이명박 정부는 여러 가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64]
그러나 세계적인 유가급등과 또한 기획재정부의 환율정책으로 말미암은 환율상승 등 대내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물가가 급상승한 것과, 한미 FTA 협상 중 가장 민감한 현안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위한 협상과정에서 2008년 4월 18일에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협상하며 제시한 조건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의 반발이 커졌다. 이는 촛불 집회나 문화 집회 등으로 번져 갔는데, 이러한 집회들을 경찰이 진압하자 이명박의 지지율은 한때 대한민국 역사상 최저인 7%를 기록하였다.[65] 6월 말에 지지율 회복을 보이면서 강경 대응으로 선회했었다는 의견이 있다.[66]
2008년 9월 한나라당에서 조사된 지지율에서는 25.6%로,[67] 10월에는 23.9%로 조사되고 있다.[68] 12월 16일에 조사된 지지율은 35.8%로,[69] 2009년 1월 31일 조사된 지지율은 34.8%에 이르고 있다.[70] 다만, 이런 지지율 상승 현상은 보수층의 결집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70]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을 전후로 지지율이 다시 20%대로 내려간 상황이나 2009년 8월에는 31.4%로 지지율이 상승하였는데 이념적으로는 중도층에서 지지율이 8.9%p 올랐고 계층별로는 중산층에서 4%p 올랐다.[71] 이는 정부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및 국립현충원 안장 결정과 북한 조문단과의 회담 이후 경색된 남·북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감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후 2009년 8~9월 지지율을 살펴보면 보수를 대표하는 신문은 50%,.[72] 진보를 대표하는 신문 등은 3~40%의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2010년 1월 4일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56.7%(매우 잘하고 있다 11.0%, 대체로 잘하고 있다 45.7%)로 나타났다.[73]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가 준비하는 동안 지지율이 53%으로 높아졌다.[74]
2010년 말 지지율이 50%를 웃돌았으나, 바닥 민심과는 차이가 크다는 지적을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서도 하였다.[75] 그 원인으로는 표본의 적정성 문제, 10%대의 낮은 응답률 등을 제시하였다.[75] 한편 그에 대해 여론조사 기관에서는 조사비용을 낮게 책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여당에서는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기에 조사하거나, 유리한 계층을 대상으로 조사하기 때문으로 풀이하였다.[75]
한편, 여론 조사기관인 한국리서치가 2년여 동안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 집권 초반 강세를 보이다가 집권 후반 약세를 보이는 역대 대통령들과는 상반된 추이를 나타내고 있다.[76]
그러나 아산정책연구원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지도의 자료는 RDD (Random Digit Dialing) 방식을 사용하여 지지도가 왜곡되었다는 우려를 나타났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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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 이후 2번에 걸쳐 ‘대통령과의 대화’ 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국정을 설명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려 하였다.
주요 정책 이 부분의 본문은 이명박 정부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방향은 다음과 같다.
국가, 사회 간 시너지 협력을 통한 발전
질적 성장 추구 - 성장과 복지 간 선순환구조 구축, 선 성장 후 복지
법치의 확립과 헌법 존중
다원주의 가치, 개성, 창의 존중 인재양성
글로벌 스탠더드와 내셔널 스탠더드의 조화
고신뢰 사회
이명박 정부는 ‘7% 성장, 4만 불 소득, 세계 7대 선진국’의 이른바 ‘747 성장’을 주 목표로 내세웠다.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 위주의 ‘녹색 성장’을 패러다임으로 정했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은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78]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이른바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제65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 기조를 밝혔다. 이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공정한 사회와 친서민정책을 강조했다. 특히 집권 후반기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 노선을 구체화하면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공정한 사회란 자율과 공정, 책임을 바탕으로 한 공정경쟁을 통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활기찬 시장을 육성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또 개인의 자유와 근면, 창의, 친서민중도실용과 삶의 선진화, 공정한 지구촌을 집권 후반기 키워드로 제시했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바탕으로 도전과 성취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를 위해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정치권, 기업 모두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 해달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 공정한 사회 구현을 위해 '실천'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김태호 총리 후보자를 비롯해 장관 후보자들이 자진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계기로 "공정한 사회 구현 위한 출발점으로 삼자"며 공정한 사회 지키기에 나서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통일세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 것은 미래 한국을 위한 준비를 독려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임태희 대통령 실장은 "통일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준비하자는 뜻입니다. 그런 준비가 지금 시점에서 이르지 않다는 의밉니다"라고 밝혔다.
이밖에 이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녹색중소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밝힘으로써 200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저탄소 녹색성장을 한층 진일보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79]
청계재단 설립 이 부분의 본문은 청계재단입니다.
17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7년 12월 7일, “우리 내외가 살아갈 집 한 칸이면 족하며 그 외 재산 전부를 내놓겠다”며 재산의 사회환원을 약속했다. 2009년 7월 6일 장학·복지재단인 청계재단을 설립하여 일부 부동산과 동산을 제외한 재산의 상당부분을 재단에 기부한다고 발표했다.[80] 이 대통령의 재산 기부 발표 직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을 비롯 뉴욕 타임스, 일본 NHK, 중국의 중국신문, 러시아 국영 1TV 등 주요언론들이 관심있게 보도하였다.[81] 2009년 8월 공식 출범한 청계재단은 330여억원으로 추정되는 이 대통령 소유의 부동산 소유권을 모두 이전받았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으로 장학금을 마련해 국가유공자 자녀, 다문화가정 자녀, 소년소녀가장 자녀, 조손가정 자녀 등 어려운 환경의 중,고교생 200~3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다.[82] 그러나, 재산 기탁이 아닌 재단 설립이라는 점과, 이사장과 이사들이 측근들이라는 점에서 그 진정성이 의심 받고 있으며[83] [84]2009년 12월엔 청계재단이 이명박의 개인 부채를 갚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청계재단이 갚은 채무에는 이명박과 개인친분이 있는 천신일에게 대선 시절 빌린 돈 30억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학금 규모도 처음에 논의되던 계획보다 절반 이상 축소된 것으로 드러났다.[85] 청계재단이 지원하는 장학금은 2010년 초부터 지급되고 [86] 같은 해 3월 12일 청계재단 첫 번째 장학생 451명이 선발됐다. 재단은 이들 학생(중학생 218명, 고등학샏 233명)에게 연간 141만원 가량의 학비를 지급하게 된다.[87]
대한민국 외 국가의 평가미국의 뉴스위크 아시아판(2010년 1월 25일 발행)이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변모시키려는 이명박 대통령 관련 특집기사를 실었다.[88] 이 잡지는 ‘한국 국격 높이기, 한국을 세계 중심으로 변모 시키려는 이명박 대통령’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은 OECD 국가중 금융위기를 가장 먼저 벗어났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글로벌 소프트파워로 부상하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 잡지는 또한 “이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 도약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 기사의 작성자는 B.J.Lee라는 한국인이다.[89]
한편 이명박은 2010년 첫 새해 순방국으로 인도를 선택하였는데, 인도 최대 신문인 타임즈 오브 인디아와 서면인터뷰를 통해 두 나라의 협력관계가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90] 인터뷰에서 이명박은 “한국과 인도는 금년부터 발효된 한-인도간 ‘경제동반자협정’ 관련 우리나라가 브릭스(BRICs)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인 CEPA는 양국 경제발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양 지역간 경제통산 관계 강화의 교량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한편 일본어판 중앙일보는 지난 1.26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경영의 구루(GURU)인 오마에 겐이치가 한국이 최근 경제 성장 곡선을 그리는 이유가 뛰어난 지도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오마에는 ‘일본의 쇠퇴, 한국의 성장곡선에는 이유가 있다’ 는 인터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 한국이 ‘이명박 대통령’을 지도자로 선택한 것도 행운이다. 이 대통령은 경제를 잘 알고, 어떤 식으로 성장 전략을 세울지도 잘 아는 듯 하다. 물론 초기의 과도한 성장정책은 문제지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정책을 전환하여 운하 공약을 수정했다.[91] ”
이러한 오마에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호평은 일본 지도자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졌다.
“ 이 대통령은 하토야마 수상,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 등 본의 지도자보다 전반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다. 아소 전 수상, 후쿠다 전 수상, 하토야마 수상은 세습 정치가이기 때문에 한번도 헝그리 정신을 지닌 적이 없었다. 뛰어난 지도자 한명만 있으면 그 국가는 반드시 성장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일본에는 현재 그같은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가 없음이 아쉽다. ”
오마에는 “한 명의 지도자가 세상을 바꾼다”면서 “기업과 국가에서도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한국의 경제성장과 일본의 추락을 양국의 지도자의 능력 차이에서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92]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 10인 중 한 명으로 이명박을 선정했다. 뉴스위크는 이명박 대통령을 7번째로 소개하면서 "한국은 세계 금융위기를 모범적으로 극복해 낸 국가"라면서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이명박 대통령의 운영 능력 덕분"이라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이어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 사상 최저 수준까지 금리를 낮췄고 부실은행과 기업들을 살리고자 빠르게 자금투입을 했다"면서 "또 통화스왑 체결로 외화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해 시장을 안정시켰다"고 설명했다. [93] 이 기사의 작성자는 B.J.Lee 라는 한국인이다. [94] B.J.Lee는 『뉴스위크(Newsweek)』의 서울특파원 이병종으로 알려져있다.[95]
글로벌 외교 이 부분의 본문은 글로벌 외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0월 29일부터 30일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석해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이 대통령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선진 7개국(G7) 이외 국가중 최초[96]로 열리는 G20 서울회의에서 G20 비회원국인 아세안 국가들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아세안 의장국인 베트남을 공식 초청했다. 이에 대해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은 "아시아에서 한국이 G20 의장국을 맡아 기쁘다"며 축하했다고 청와대 측은 밝혔다.[97] G20 서울회의는 미국과 중국의 양보 없는 다툼 속에 일촉즉발로 치닫던 '환율 전쟁'을 "각국이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한다"라는 구속력 있는 합의를 이끌어 내어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0년 국내 10대 뉴스로 선정되었다.[98] 외신들 또한 한국이 서울 G20 정상회의로 명실상부한 세계경제 주도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평가하였다.[99] 한편, 국가브랜드위원회는 G20 서울회의로 1조 8천원의 홍보효과가 발생하였다고 발표하였다.[100]
아세안은 동남아시아의 지역협력기구로서 2010년 10월 현재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10개국이 가입해 있으며, 중국과 EU에 이어 한국의 3대 시장이기도 하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해 아세안 10개 나라 정상들과 양측 관계를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함으로써 경제협력 뿐만 아니라 안보문제 등에서 양측간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통해 한-아세안센터 지원 예산 증액, 아세안 지역 장학생 확대 등도 약속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한-메콩강 외교장관회의' 신설을 제안했고, 아세안 정상들은 환영 의사를 밝혔는데, 메콩강 경제권은 천안자원의 보고로 주목받으며 세계 각국이 진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다. 아세안 역내 메콩강 유역 국가는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태국 등이 있으며, 이로써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신아시아 외교의 핵심 대상인 아세안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강화하게 됐다. 즉 아세안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흥국의 리더 역할을 통해 지역내 중심국가로 올라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신아이사 외교' 구상을 가속화하게 된 것이다.[101]
이 대통령은 2011년 5월 8일부터 6박7일 일정으로 유럽 3개 나라를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국인 독일에서는 통일염원 행보를, 두 번째 방문국인 덴마크에서는 녹색성장 분야 협력을 위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마지막 방문국인 프랑스에서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전·현직 의장국인 한국과 프랑스가 'G20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등 오는 11월 칸에서 열리는 G20정상회의에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대통령은 첫 방문지인 독일에서 "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에 대한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두번째 방문지인 덴마크에서 라스 뢰케 라스무슨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녹색성장 동맹'을 체결했는데, 우리나라가 안보 외의 분야에서 외국과 동맹을 체결한 것은 처음이다. 이 동맹은 덴마크의 앞선 녹색기술과 한국의 성장 동력을 결합해 세계 녹색성장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의지다. 대통령은 마지막 방문지인 프랑스에서 사르코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지난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의장국이었던 한국과 올해 의장국인 프랑스와의 긴밀한 공조 의지를 재확인했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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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입문한 1993년부터 그는 불성실한 재산공개로 비난을 받았다. 1996년에 그는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선거 비용을 속이고 증인을 국외로 도피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져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기 직전 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또한 그가 서울시장에 재직하던 당시에도 여러 가지 의혹과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이명박 공짜 테니스 사건[103]이 있으며, 그의 가장 큰 치적이라 일컬어지던 청계천의 연간 유지비가 무려 100억원에 달해 무리한 재정지출에 대한 비판도 있고,[104] 청계천 공사시 생태계의 파괴, 환경파괴라는 비난과 함께 상당수의 문화재가 파괴되어 논란이 되었다.
2007년 3월에는 사석에서 "19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105] 이 발언은 이 ‘빈둥 발언’은 민주화 세력, 즉 운동권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돼 안팎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됐다. 이처럼 그가 ‘운동권의 적’처럼 매도되었다.[105]
그러나 그에 대한 주요한 비판은 그가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에 나타났다. 당시 한나라당 경선 상대였던 박근혜와 대통합민주신당 등 경쟁 정당들이 뉴타운 의혹,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을 통한 탈세, 소유 빌딩 지하업소의 성매매[106][107] 등 여러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BBK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그의 대선 행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까지 거론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명박은 소유 빌딩 지하업소의 성매매와 관련해서는 2008년 11월, 계약 내용과 달리 유흥주점 영업을 했기 때문에 가게를 비워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었다.[107]
주요 공약이었지만 논란이 많았던 ‘한반도 대운하’는 결국 2008년 10월 7일 국무회의에서 확정된 ‘이명박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서 빠지게 되었다.[108] 그러나 일부 대운하를 지지하는 민간단체에서는 대운하의 재추진을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109][110]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영어몰입교육을 검토하다 진중권 등 일부 진보운동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후일 이명박 본인이 영어몰입교육을 하지 않겠다며 수습하기도 했다.[111]
2008년 2월 10일에서 11일 사이에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해서 서울시장 재임 당시 숭례문 주변을 개방한 이유로 책임론이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불분명하다는 점이 있다.
국무회의 구성을 위해서 15인의 국무위원 후보자를 지명하였으나 그 중 3인이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자녀의 국적 문제 등으로 자진사퇴를 하였으며, 인선과정에서 능력주의 실용인사 코드를 주장하였으나 일명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 부자)라고도 부르는 인맥으로 채워진 편중 인사라는 지적이 있었다.[112][113]
또한 방송통신위원회, KBS, YTN 등의 주요 방송·언론사 및 관련 기관장을 방송·언론에 전문적이지 못한 친정부 인사들로 채우고, 반대하는 직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실상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는 비판이 있다.[114][115] 이에 관해 방송·언론인 7800여 명은 ‘국민주권과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대한민국 언론인 시국선언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언론인 시국선언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이명박 정부는 언론 탄압과 국민주권 유린을 그만두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했으며,[116] 2008년 12월 26일에는 신문·방송 겸영에 반대하여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문화방송의 주도로 총파업을 하기도 했다.
또한 2009년 1월 정부가 제시한 녹색 뉴딜은 그 효과가 과장된 면이 많으며 토목사업을 녹색으로 포장하려 한다거나 4대 강 정비 사업이 한반도 대운하의 전초전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민주당의 이정섭 의원은 “녹색 뉴딜은 전체 투자의 79.5%가 4대 강 살리기 등 토목, 건설 사업인 ‘회색사업’으로 가짜 녹색 뉴딜이며 녹색 뉴딜 사업으로 창출되는 일자리는 95만 6천 개라는 정부의 추정과 달리 실제 추정치는 25만 개에 불과하다고 주장데 반해 4대 강 정비사업의 경우도 정부 주장은 27만 개이나 실제는 3만9천 개에 불과하다. 또 정부의 잘못된 성장률 예측으로 12조 원의 세수가 줄었으며 결국 국민의 세금 부담이 커졌다. 또 4대 강 홍보 동영상과 책자의 일부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이 탄로 났으며,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 여론조사를 숨겼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117] 2009년 12월 17일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5)에서 제이크 슈미트 미국 국제기후변화소장은 한국이 환경보전과 녹색성장을 함께 추구함에 따라 혁신기술과 청정기술이 성장동력이 되고 있으며, 이들 분야에서 2020년까지 약 15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했다.[118]
2009년 5월 23일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검찰의 정치적 타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대한 최종 책임자를 이명박 대통령으로 보는 견해이다. [119] 그러나 노무현 및 그 측근들이 스스로 자초했다는 견해도 있다. 노무현 수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고 있던 가운데 2009년 6월,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시사자키》에서 진행자인 김용민 전 한양대학교 교수는 이명박의 정적에 대한 살해 행위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이 대통령의 비참한 최후를 이야기 한 후 “여기서 말한 이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현재까지는….”이라는 말로 이명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120][121][122]
2009년 6월 28일 일본에 방문하여 일본 올림픽 유치를 적극 지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123] 그러나 국제대회 유치는 대륙순환 규정에 의하여 일본이 유치 할 경우 한국은 유치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나 2020년 부산하계올림픽 유치를 준비하고 있음에도 그 같은 발언을 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YTN의 《돌발영상》에 보도된 여러가지 어록들과 함께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2008년 멜라민 파동 당시 식약청을 방문하여 멜라민이 첨가되어 문제된 제품들을 살펴보는 중에 "(포장지에) 멜라민이란 말이 없네" 라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24] 3월 5일에는 ‘마이너리티 리포트’편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 떡값 명단’ 발표에 앞서 이동관 당시 대변인이 미리 해명한 일에 대한 비판을 실어 방송하여 논란이 일었으며[125], 이러한 비판 보도를 하는 YTN에 대해 언론 장악이라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돌발영상은 폐지되었다.[126] 후에 우여곡절 끝에 돌발영상이 부활한 후 ‘궁금증’편에서 이명박이 참다래 농장을 방문해 "미생물이 어디 있어? 안 보이네"라는 발언을 방송하여 또다시 논란이 일고난 후 구본홍 YTN 사장이 급작스레 사표를 내고 보도국장이 바뀌고 돌발영상의 임장혁 PD가 3개월 대기발령 조치를 받는 등 YTN에 대한 언론장악 의혹은 끊이지 않고 있다.[127] 또한 지난 2009년 5월 경인 아라뱃길 현장보고회에서의 연설에서 "4면의 바다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발언을 하여 큰 파장이 일었으며 네티즌들은 "대한민국이 섬나라인가?" 라며 비판하였다. 당시 KBS는 이명박의 이런 발언을 그대로 자막으로 내보냈다.[128] 그리고 2008년 현충원 방명록에서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고, ‘바치다’를 ‘받치다’로 쓰는 등 맞춤법 오류로 인하여 비판을 받았고[129] 이를 조롱하여 “나는 이명박을 찍지 않았읍니다” 라는 유행어가 생기면서 이를 쥐 그림과 함께 티셔츠에 인쇄한 제품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130]
2008년 7월 15일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에게 독도의 영유권 주장에 관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하였고, 후에 아사히와 문예춘추도 이를 보도했던 것으로 드러났으나[131] 양국 정부는 이를 모두 부인했다.[132]주일대사 권철현은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을 항의방문하여 요미우리의 보도내용에 대해 시정조치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요미우리는 해당 기사를 삭제했으나[133] 정정보도는 하지 않았다.[132]이에 대하여 민주당과 시민단체를 비롯한 국민 1,886명이 모여 요미우리의 허위보도에 대하여 4억여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134]법원은 청와대의 사실 조회 결과와 일본 외무성도 “한일 정상이 독도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점을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 고 요미우리의 보도가 잘못되었다고 판결했으나 소송을 낸 사람들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한다고 판결했다.[135]
역대 선거 결과참고로 득표율은 득표수를 유효표수로 나눈 뒤 100을 곱하여 나온 퍼센티지 값입니다.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4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4대 민주자유당 38.5% 7,923,718표 비례대표 25위
제15대 총선 국회의원(종로구) 15대 신한국당 40.5% 40,230표 1위
제3회 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32대(민선 3기) 한나라당 51.8% 1,819,057표 1위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17대 한나라당 48.7% 11,492,389표 1위
전과 기록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시절 박근혜 측과 민주당 등 야당 측에 의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전과기록은 64년 한일협정 때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136] 한일회담 반대 6.3항쟁 를 주도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1건이며 훗날 사면되었다고 밝혔다. 선관위는 이명박의 전과가 1건이라고 공시했다.[137]
이와는 별개로 현대건설 재직 당시 법인으로 벌금형을 받은 건이 있다.[출처 필요]
프로필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서울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명박(2008년 6월)학력1960년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196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8년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객원연구원
2004년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2004년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박사
2005년 몽골국립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2005년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2011년 프랑스 파리 제7대학교 명예예술ㆍ문학ㆍ철학ㆍ고전학박사
주요 경력1965년 : 현대건설 공채 입사
1977년 :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1988년 : 현대건설 회장
1977년 ~ 1992년 : 현대건설, 인천제철 등 현대계열사 10개사 사장 및 회장
1992년 ~ 1998년 : 제14, 15대 국회의원
1992년 ~ :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
1998년 ~ : 대명기업/대명통상 대표이사
1999년 ~ 2002년 : 아·태 환경 NGO 한국본부 총재
2000년 ~ 2008년 :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2000년 : LKe뱅크 대표
2000년 ~ 2002년 : 한국장애인정보화협의회 명예회장
2002년 7월 ~ 2006년 6월 : 제32대 서울특별시장(민선 3기)
2006년 ~ 2008년 : (사)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2007년 8월 20일 :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
2007년 9월 : 한나라당 경제살리기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
2007년 12월 19일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당선
2008년 2월 25일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취임
상훈1982년 체육훈장 백마장·거상장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85년 금탑산업훈장
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
1998년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조선일보)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
2005년 2005 세계의 인물 대상(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그룹 fDi 매거진)
저서《신화는 없다》 (1995년), ISBN 89-349-0212-4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2002년)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2005년), ISBN 89-5924-939-4
《온몸으로 부딪쳐라, 어머니,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2007년)
《6·3 학생운동사》
가족 관계1970년 김윤옥과 결혼했으며, 이주연, 이승연, 이수연, 이시형의 네 자녀를 낳았다. BBK 의혹 관련하여 제기된 주식회사 다스의 대주주인 이상은은 이명박의 맏형이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은 둘째형이다.
혼맥둘째 형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의 아들인 큰조카는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대표이며, 이상득의 딸인 조카딸은 LG그룹 명예회장 구자경의 동생, LG벤처투자 구자두 회장의 장남과 결혼하여 사돈[138]의 관계를 맺고 있다. 셋째 딸 이수연은 한국타이어 조현범 부사장과 결혼해,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부: 이충우
모: 채태원
형: 이상득, 국회의원
형: 이상은
처: 김윤옥
이주연(1971년 ~ )
사위: 이상주
이승연(1973년 ~ )
사위: 최의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전문의
이수연(1975년 ~ )
사위: 조현범, 한국타이어의 부사장[138].
이시형(197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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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서는 무엇을 해봤다 라고 하면 그렇게 믿는건지 비꼰건지 알수가없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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