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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 전 대통령의 <내가 사랑한 여성> 204~210페이지 중 ‘발해를 꿈꾸는 아이들’ 부분 발췌한 내용.
상당히 오래 전부터 나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사무실로 전화나 편지를 통해 청탁(?)을 해오고 있는 10대, 20대의 젊은 민원인들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의 부탁인 만큼 나도 가급적 도움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도 또한 그럴 성격의 문제도 아닌 것 같으니 여간 고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청탁의 요지는 1996년 벽두에 은퇴해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대중가수 서태지씨가 무대에 복귀하도록 내가 나서서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민원인들은 물론 서태지씨의 열성팬들입니다. 아마도 대중가수 중 서태지씨를 각별히 좋아한다고 내가 TV에서 답변했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다는 어느 청년은 서태지씨와 내가 ‘고졸 출신자들의 희망’이란 공통점이 있어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라고 편지에 밝혔지만, 젊은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간절히 그의 복귀를 소망했으면 나 같은 정치인에게까지 부탁을 해왔겠습니까? 일견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요청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손자뻘의 나이라지만 내가 나설 만한 성질의 일도 아니고 또 내가 나서 봤자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엄연한 대중 예술인의 자기 결단인 만큼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서태지씨를 좋아하는 젊은이들, 즉 서태지씨 팬클럽은 여느 연예인들 팬클럽과는 좀 다른 면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란 이름으로 기념 공연을 열어 온 것은 나도 그 행사에 초대된 적이 있었기에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모임이 올 봄에 <북한 청소년 돕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소식은 나로서도 참 의외였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북한 청소년이 불쌍해서 도와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북한 청소년들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자’는 취지의 행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보여 준 자유와 도전정신을 기리자’는 목표를 가지고 서태지씨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뜻깊은 많은 활동을 벌여 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앞서의 행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 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 내게는 참으로 각별한 감회를 안겨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가 서태지와 아이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역시 노래 [발해를 꿈꾸며] 였습니다. 영국에서 돌아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활동을 시작했던 1994년 쯤으로 기억됩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대두되기 시작한 신세대 문화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던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기성 세대 일반처럼 우리의 신세대문화란 것이 너무 물질적이고 감각적으로만 치우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세대의 대중음악이란 것도 솔직히 생경스럽게만 느껴져 혹시 외국의 저급한 대중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국적 없는 노래들이 아닌가 하며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표절시비도 많았던 것 같고요.
그러던 차에 어느날 잡지에선가 서태지씨의 인터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신문에서 청소년들이 통일 문제에 관심이 적고, 오히려 통일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정말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발해를 꿈꾸며]란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름만 듣고는 무슨 홍콩 영화 배우 이름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참으로 기특하고 가사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나는 이들의 테이프를 서둘러 사서 들어 보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에 대해서 내가 뭐 알겠습니까마는 나름대로는 열심히 분석해 보면서..... 그 결과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우선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수가 있을까/망설일 시간에 우리를 잃어요.”로 시작되는 이 곡은 노랫말이 좋았습니다. 왠지 도포를 걸쳐야 자연스러울 것 같고 그만큼 신세대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졌을 민족 정서를 이들은 과감히 현실화, 실감화한 것입니다.
곡 자체도 아주 세련되고 박진감 넘치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내가 뭐 알겠습니까마는. 음악의 중간중간에 사설조로 읊조리는 것이 랩이란 것도 이때 알았습니다. 주로 흑인들의 대중 음악에서 많이 쓰이는 창법인데 이들이 한국화 했다는 주변의 설명 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우리 판소리와도 비슷한 일면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7,80년대 민중 가요에서 중요시한 ‘가사 정신’과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겠고요.
그런데 내가 차 안에서 가끔 들으며 참 재미있고 이채로운 신식 국악이구나라고 생각해 오던 노래도 알고 보니 이 친구들 노래 [하여가] 였다고 비서가 귀띔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태평소 소리 한 자락이 시원스럽게 깔리면서 흥겹게 펼쳐지는 이 노래를 차 안에서 들으면 나는 왠지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활력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참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서태지씨는 음악을 하려는 뜻이 있어 대학에 가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밝혀 입시 교육에 주눅 들거나 패배 한 많은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주고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자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서태지씨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가슴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 신세대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싹틈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밑바탕되어 이들의 4집 앨범 [시대유감]이 공윤심의(공연윤리심의)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름대로 나는 국회 차원에서 노력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들의 은퇴이후 [서기회]는 행사에 나를 초대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뭘 모르는 기성세대들은 곧잘 이 친구들이 ‘텔레비전을 망쳐 놨다’고 비난합니다. 아마도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범람하게 된 댄스 그룹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 한 토막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TV에서 배우 박중훈씨가 ‘랄라라’하고 흐느적거리며 트위스트 춤을 추는 무슨 맥주 광고를 보다가 생각난 일화입니다. 내가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시절 내한한 클리프 리처드라는 인기 가수의 공연을 보고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에 담았던 일화이기도 합니다. 당시로는 대사건이었던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이 근 2,30년전의 일이니 그러고 보면 그때 당시 기성 세대의 비난을 받으며 열광했던 소녀들이 지금 신세대 자녀들을 걱정하는 어머니 위치쯤 되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후(세계 제2차 대전)에 프랑스에서 트위스트가 한창 유행했을때 프랑스의 늙은 배우 장 마레는 “트위스트는 춤이 아니라 야만인의 광태다. 25세 이상의 남녀들은 추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열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 여류 작가 프랑소 아즈 사강은 트위스트는 “스텝이 간단하고 홀로 출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는 문명을 건너 뛴 원시의 호흡이 있다”라고 되받았다고 합니다. 요즘의 신세대들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이야기겠지요. 세대간에는 항상 단절의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얼마전 신세대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신세대들 3명중 1명이 ‘전쟁이 나면 도망가겠다’고 응답했다는 결과가 신문에 실려 기성 세대들을 경악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명문 대학 정외과 교수는 ‘이승만과 김구는 한 클래스에서 고작 몇명 정도만이 알고, 여운형과 장준하를 아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라고 탄했었습니다. 솔직하고 개성 강하고 창의적인 우리의 신세대들이 어째서 그랬을까? 기성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책임 많은 정치인으로서 나부터가 많은 반성을 해야겠지만, 나도 솔직히 우선은 암담하고 허탈했습니다.
그때 문득 서태지씨가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시대유감]에 앞서 나 역시 ‘서태지 부재유감’이 먼저 찾아 던 셈입니다. 서태지씨 팬들의 요청에 달리 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를 고민하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너무 작위적일지 모르겠으나 [발해를 꿈꾸며]에 화답하는 [신광개토시대]를 한시 바삐 열어 민족사의 비전을 밝혀 주는 것이 어떨까라고요. 아울러 신세대들의 예술적 창의가 만개하도록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으며.....
대통령의 존경을 받는 가요계의 대통령, 서태지.
- 김대중 -
아직 꿈꾸던 그날은 오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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