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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끼고 있다>
내가 국내에 없었던 기간은 겨우 10일이었으나 그동안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가장 크게는 북한이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기로 하면서 생긴 이런 저런 일들이지만 경제 금융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우선, 비트코인.
출국하기 전에 JTBC에서 비트코인에 대해 토론을 하려고 하니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방송에 나가서 토론을 할 정도로 잘 아는 주제가 아니어서 사양했다. 비트코인 열풍이 닥치기 전에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나도 궁금해서 이것 저것 읽어봤지만 이해가 안되는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세부 기술적 사항을 직접 해보지는 않아도 그 구조는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내가 보기엔 내가 그 기술의 핵심을 파악한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 읽어 봤는데 모른다면 그건 내 능력 밖이다. 이 정도에서 내 무지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옳다. (게다가 언제 토론을 하느냐고 물으니 내가 국내에 없는 기간 도중이었다.)
L.A.에 도착하니 그새 법무부장관이 금지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가 철회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청중들 사이에서도 질문지를 통해 비트코인을 물어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잘 아는 분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지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법무부 장관이 나설 일은 정말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결국 JTBC에서 토론을 하기는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보기에 이건 좀 너무 성급했다. 무엇에 대해 토론을 하려면 사회를 보는 사람, 토론을 하는 사람, 그리고 그 토론을 시청하는 사람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체는 좀 알고 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내가 보기엔 거기에 나온 사람 모두 화폐경제에 관한 경제적 이해와 암호화폐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모두 겸비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은 유시민씨 의견과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사기니까 금지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내 생각엔 소비자 보호, 거래 투명성과 실명성 등만 확실하게 하면 되지 않나 싶다.
다음, 파리바게뜨
문제가 타결을 봤단다. 종래 제빵사들을 고용하던 협력사는 없애고, 본사와 가맹점이 공동 출자(10억 원)한 자회사를 만들어 제빵사들을 고용하기로 했으며, 임금을 16.4% 올리고, 복지는 향후 점차 본사 수준으로 맞추어주도록 한다고 한다. 노동부는 벌금을 물리지 않기로 했고 파리바게뜨는 소송을 취하했다. 이것 하는데 넉달 걸렸다.
노동부가 설쳐서 무엇이 더 달라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제빵사들은 협력사의 정규직원이었다. 다수의 협력사가 아니라 하나의 자회사로 통합되는 만큼 파리바게뜨 본사에 대한 제빵 노동자의 협상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낳아 노동의 안정성이 개선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파리바게뜨는 어쨋든 본사 직접 고용은 회피했다. 반숙련 제빵사를 간접적으로 고용하는 사업모델엔 변화가 없다. 이 정도면 노동부가 애초에 당장 한달 안에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말을 안 들으면 수천억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협박조로 들이댈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은근히 압력을 넣으면서 협상을 종용하는 것으로도 같은 결과를 이룰 수 있었을 것 같다. 파리바게뜨가 인상된 임금과 강화된 노동 경직성에 따른 수익성 악화을 어떻게 대처할지는 앞으로 과제로 남았다.
그리고 퇴직연금.
이건 귀국한 뒤에야 알게 된 것인데, 노동부가 그동안 수년에 걸쳐 추진하던 퇴직연금 제도 개혁을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했다.
지금 퇴직연금은 사용자인 회사와 금융회사가 계약을 맺고 운영하는 계약식으로 일본에서 베껴 온 것이다. 어느 금융사에게 돈을 맡길지, 어떤 펀드에 투자할지 등에 대해 막상 퇴직할 때 돈을 받을 피고용인들은 통제 권한이 별로 없다. 그래서 대출을 갖고 로비를 할 수 있는 은행이나 보험사가 130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을 거의 다 석권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의 문제점을 지적해왔고 노동부도 이를 받아들여 기금식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해왔다. 기금식 방식에선 매달 적립되는 돈을 운영하는 기금을 만들고, 사용자 회사와 직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같이 이사회에 참여해 자산 배분 정책과 펀드 운영사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최종 수혜자인 직원들의 의견이 더 반영될 수 있고 중간 업자의 개입에 따른 문제를 제거할 수 있으니 과거보다는 선진적인 방식이다. 일본만 해도 계약식과 기금식 중에서 고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한국은 계약식 밖에 없다.
그런데 노동부가 이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수년 동안 노동부가 추진해 온 사안이고, 바로 지난 12월만 해도 노동부 김영주 장관이 기금식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석상에서 발언했다고 하는데, 갑자기, 그것도 아무 설명도 없이 앞으로 추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금융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 하고 있다.
이건 사실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업 퇴직연금은 지금은 130조 원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자산이다. 직장인들의 노년 은퇴 생활은 물론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심대하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짤막히 단순 보도만 했을 뿐 별로 크게 다루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한국 언론은 연금 문제에 둔감하다. 국민연금에 관해선 조금 나아졌지만 기업 퇴직연금 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한 지에 대해선 거의 까막눈 수준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퇴직연금제도는 문제가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퇴직연금 제도의 주무부서가 왜 노동부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퇴직연금 제도의 핵심은 소득세 면세 제도다. 매년 면세로 소득의 몇 퍼센트, 액수론 얼마까지 적립할 수 있는지, 나중에 돈을 꺼내 쓸 때 소득세는 어떻게 부과할지가 핵심이다. 따라서 기재부 조세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노동부가 건드릴 게 하나도 없다. 노동부 입장에서 중요한 분야는 수급자, 즉 나중에 돈을 받을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만 신경쓰면 된다.
게다가 사실 한국의 퇴직연금제도는 말이 연금이지 기존 퇴직금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퇴직 "연금"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겨우 일년에 한달치 돈을 붓는 것이니 30년 일해봤자 30개월 어치 돈만 적립되었을 뿐이다. 그걸 갖고 은퇴 후 연금에 쓰라고? 노후 생활 준비하기엔 택도 없다. 적립한 돈도 대부분 원금이 보장되는 예금에 넣어 놓고 있어서 장기적 투자 수익률이 낮을 수 밖에 없다.
2005년 정부안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도대체 왜 이렇게 설계 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노동부는 퇴직금 제도에 있어서 노동자 이익 보다는 사용자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퇴직금을 별도로 쌓지 않고 장부상으로만 인식하도록 하다가 IMF 위기 때 기업이 도산하면서 수많은 피해자를 낳게 했다. 퇴직연금제도도 기껏 바꾼다는 것이 일본에서도 한참 오래 된 계약형을 들여 왔다. 이미 2001년부터 일본에서 추가로 도입된 기금형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내가 보기엔 전시행정, 졸속행정, 땜방행정의 전형적인 예였다. 그리고 이게 12년이 지난 지금껏 변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젠 자기들도 문제가 있다고 인정해서 개선책으로 도입하려던 기금형 퇴직연금을 아무 설명도 없이 취소했다. 기금형이 도입되면 시장을 잃을 은행과 보험업계의 로비에 넘어간 것으로 의심된다. 하지만 언론이나 노동자나 아는 사람이 없어 이슈화도 안 되고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그동안 있었던 일로 세 가지를 들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경제 이슈는 최저임금 시행에 따른 충격이다. 이미 무리수를 두었는데 이를 무마하려고 후속으로 악수를 두고 있다. 처음엔 일년에 그친다던 고용지원금을 이제와선 내년에도 한다고 한다. 그것도 별 효과가 없어서 신청자도 미미하다. 자칫하면 준비한 3조원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망신만 당할 수 있다. 자영업자 계층는 이미 동요하고 있고 청와대도 당황하는 눈치다.
그것만이 아니다. 내 생각엔 아마 올해 내내 이 문제와 노동시간 축소, 정규직화 불만, 공무원 증원, 일자리 창출 부진 등으로 한국 사회가 매우 시끄러울 것이다.
노동은 상품과 서비스 시장에서의 수요 공급이 만나면서 생기는 파생 시장이다. 노동은 인간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상품시장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경직적이고 과거 인간관계 상의 역사에 영향을 받는다. 조세와 재정으로 시작해서 상품과 서비스 시장에서 변화를 꾀했어야 하는데 그것은 놔두고 노동, 그것도 가격 개입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수순이 꼬였다. 세상을 자본 대 노동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복잡한 현대 경제를 다룰 수 없다.
청와대는 이미 당황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앞으로 초조해질 것이고, 추가 조치를 요구할 것이다. 이미 판은 벌어졌으니 공무원들은 이런 저런 대책을 계속 가져올 것이다. 처음 보기엔 그럴 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또다른 탁상행정, 졸속행정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게 우리나라 공무원 실력이다.
나는 이런 논란들이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 결국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회의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이미 헤매기 시작한 부동산 문제와 가계부채 문제가 겹치면 문재인 정부는 집권 일년만에 경제정책에서 궤도 수정을 요구받게 된다. 그것이 지방선거 전일지 아니면 후일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러나 국회에 또아리를 치고 있는 야당이 저러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 출신 지방 자치 단체장이 몇명 더 뽑힌다고 해서 국정 개혁에 도움 될 일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구름이 끼고 있다. 지지율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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