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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101051
    작성자 : 마포김사장
    추천 : 11
    조회수 : 2650
    IP : 124.49.***.23
    댓글 : 3개
    등록시간 : 2019/12/31 10:21:06
    http://todayhumor.com/?panic_101051 모바일
    철없던 시절의 연애에 관하여
    옵션
    • 창작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강원도 철원에 있는 학교에
    잠시 전학한 적이 있다.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나는 반 친구들과 금방 어울릴 수 있었다.
    그 무렵에 여자아이 한 명도 전학을 왔다.
    '하나'라는 이름이었다.

    긴 머리카락에 살결이 희고 예쁜 아이였다.
    특히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같은 시기에 전학을 왔다는 이유 때문인지
    나는 그 아이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하나는, 나와는 달리
    친구를 전혀 사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절대 따돌림을 당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외심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아이들이 어딘가
    꾀죄죄하고 촌티 나는 꼬맹이들,
    이라는 느낌이었던 데 반해
    하나는 유난히 예뻤다.

    이상했던 점은
    늘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었다는 거다.
    선천적으로 한쪽 다리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자라는 도중에 다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짓궂은 법이어서
    보통 그럴 때는 놀려대기 십상이지만
    이 학교 아이들 중에는 아무도
    하나를 대놓고 놀리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아이 중에 딱 한 명,
    하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미도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옷차림이 언제나 화려한 아이였다.
    아이들 입성에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그 옷값이 비싸다는 걸 알 정도였으니
    분명 사는 집이 유복했으리라.

    미도는 하나를 괴롭힐 때마다
    겉으로는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조롱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의 외모를 질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가 전학을 오기 전까지,
    미도는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아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는 지극히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늘 책상에 앉아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그래도 다른 여자아이들이 말을 걸어오면
    고분고분 함께 놀긴 했다.
    즉 먼저 다가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아이였으니 미도가 노골적으로 놀려도,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며 쿡쿡 찔러도
    하나는 태연하게 학교를 다녔다.

    딱히 참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담임선생님에게 일러바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담담하게 일상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우리 반을 비롯한 같은 학년의 어느 누구도
    하나에게 손을 뻗지 않았던 이유는
    그 아이가 이미 미도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점과,
    그런 괴롭힘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모습에서
    어린 아이로서도 범상치 않은 뭔가를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만은 하나를 피하거나 거리를 둘 수 없었다.
    바로 옆자리 짝꿍이었으니까.
    그 아이가 교과서를 깜빡하고 온 날에는
    내가 보여줘야만 했다.

    하나는, 일부러 그런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자주 교과서를 잘못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또 공부는 잘했다.
    반에서 가장 똑똑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말이다.

    실은 옆에 앉다 보니 어쩌다 눈치를 챘는데,
    아무래도 가끔은 
    아는데도 모르는 척하거나
    일부러 틀린 답을 적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그 아이와 엮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하나는 대충 이런 아이였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전학한 해의 늦가을 무렵이었다.
    하나가 학교를 결석하는 바람에,
    누군가가 급식으로 나온 빵과
    숙제용 갱지를 집에 가져야 줘야만 했다.

    그럴 때는 보통 결석한 아이의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동급생이
    가져다준다는 규칙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이 가장 가까울 리는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나의 집까지 가는 길은
    쓸데없이 멀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억새가 무성한 강가의 풍경만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날 나는 하나의 어머니로부터,
    그 아이가 왜 다리를 저는지 얻어듣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다리가 짧은
    '소아 선천성 기형'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어릴 때부터 건강이 나빴고,
    결국 요양도 할 겸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거라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해 주었다.

    "네가 하나의 짝궁이라지.
    우리 하나가 몸이 안 좋아서
    내가 늘 걱정이야.
    잘 좀 보살펴 주렴."

    그날 내가 하나에게
    빵과 숙제용 갱지를 전해주고 돌아가려 할 때,
    하나의 어머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처연하기까지 했는데,
    당시의 내가 '처연'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리 없지만
    어쨌거나 '짝궁으로서 잘해 줘야겠다'
    하고 결심했던 건 사실이다.

    이후로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내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 뒷자리에
    하나를 태워서 데려다주곤 했다.

    아이들 눈에 띄면 구설수에 오를 수 있지만
    다행히 하나는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귀가했고
    나 역시 그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건 두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니 칠판에
    하나와 나에 대한 유치한 소문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미도의 짓인 듯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친한 반장에 따르면
    "너네 둘이 학교가 파하면 늦게까지 같이 있더라"
    는 소문이 전교에 퍼졌다고 한다.

    나는 별일 아닌 척하며 넘겼지만
    하나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듯하다.
    그날따라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가겠다고 했다.

    계절은 초겨울로 접어들어서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날씨도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퍼뜨린 그까짓 소문에
    뭘 그렇게 신경을 쓰나 싶어서
    나는 좀 화가 났다.

    고작해야 국민학교 3학년일 뿐인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나는 억지로
    하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페달을 밟았다.

    가는 도중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라면 고집을 부리지 않았겠지만
    나는 화가 난 상태였고 오기가 발동하여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다음날 하나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다음날도 그랬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하나가 몸이 아파서
    큰 병원이 있는 서울로 다시
    이사를 간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하나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앓았다.”
    어쩐지 하나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날, 소나기 맞은 탓 아냐?”
    하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하나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었다.

    하나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 같니?”
    나는 하나의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을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야.”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날 밤, 나는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하나네가 이사하는 걸 가 보나 어쩌나.
    가면 하나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했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그 집도 말이 아니야,
    서울서 그렇게 큰 회사를 부도로 남의 손에 넘기고
    겨우 여기로 와서 그럭저럭 자리 잡나 싶더니
    이번에는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자식이라곤 하나라는 여자애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에는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선 완전히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그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우리 애를 같이 묻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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