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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카라빠돌이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14-09-14
    방문 : 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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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빠돌이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36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9-26 20:27:59 1 삭제
    그리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에 귀속된건 사실 그 땅에 주인이 없기 때문이에요.
    독일이 칼리닌그라드를 가진다는건 말 그대로 2차대전의 악몽의 재현입니다. 저 땅이 연결이 안된다는 명분을 활용해 2차대전 일으킨게 히틀럽니다.
    즉 쾨니히스베르크의 주민들이 격리됬다면서 자국선동을 통해 2차대전을 감행한게 독일이었으니까요.

    독일이 저 땅에 종주권을 행사하는건 프랑스.영국.폴란드. 특히나 폴란드에겐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중대한 도발입니다.
    폴란드는 저것땜시 소련과 독일의 야합으로 완전 박살이 났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폴란드나 리투아니아가 요구한다는것도 우스운일입니다.
    거긴 진짜로 독일땅입니다. 프로이센이 영토확장하여 왕국이 되기전에 프로이센이 발흥하고 수도로 삼은곳이 쾨니히스베르크에요.
    거길 리투아니아나 폴란드가 자기땅이라고 하는건 일본의 도쿄나 중국의 북경을 우리땅이라고 하는것과 같은 개소립니다.
    대마도나 만주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곳이란뜻이죠.
    그렇기에 러시아가 거기 종주권을 행사한거에요.

    명분있는 국가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거기에 러시아는 부동항 상실할 수 없다는 실제적 이유가 있었구요.
    결국엔 제1의 원인은 쾨니히스베르크. 칼리닌그라드를 자국영토로 주장할 명분있는 국가가 나치독일을 2천만 피를 흘리고 물리친 러시아 빼곤 아무도 없었단 겁니다. 즉 러시아가 모든 국가보다 명분이 한 1.5배는 상위에 있었어요.
    35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9-26 20:19:43 1 삭제
    칼리닌그라드는 원래 독일땅입니다.
    프로이센의 땅이었고 쾨니히스베르크였죠.
    그러다 독일이 2차대전에서 완전히 처 망하면서 넘겨준땅입니다. 현재 독일영토는 독일제국시절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즉 2차대전 이전에 독일영토로쳐도 상당히 쪼그라든 형태입니다.
    그리고 2차대전 발발한 원인자체가 저 쾨니히스베르크가 월경지가 되어서 폴란드에 의해 끊겼기 때문이죠.
    만약에 쾨니히스베르크와 동프로이센이 연결이라도 됬다면 2차대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희대에 도박꾼인 히틀러란 인간이 있다면 연결되었어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한 독일제국의 상실영토를 다 찾아와야 한다고 미친소릴 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겠지만요. 워낙 미친 도박꾼이었던게 히틀러였습니다. 베팅도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흑해의 보스푸러스 해협은 뭔가 착각을 하시는것 같습니다.
    국제조약인가로 해서 터키는 저기를 자국의 결정에 따라 봉쇄할 수 있어요. 그건 공인된 권리라 씹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터키가 러시아와 척질 각오가 아니라면 안하겠지만 만약에 정말로 러시아와 미국의 큰 국지전이 벌어지고 터키가 미국편에 선다면
    보스푸러스 해협은 완전봉쇄됩니다. 거기 폭이 2~3km밖에 안되는데 분명 터키군이 거기 절벽파고 요새포를 숨겨놨을겁니다.
    그리고 해협봉쇄할때 더 만들면 되구요. 그럼 아예 흑해는 호수됩니다.

    전 지브롤터 해협보다 보스푸러스 해협이 더 재미있어요.
    지브롤터는 그래도 10km가 넘어 약 12km되기 때문에 이동할 공간이 있지만 보스푸러스 해협은 정말로 철쇄로 막어버릴만큼 좁습니다.
    그게 다 지중해가 빙하기가 끝나면서 담수유입으로 넘쳐서 거기가 물로 뚫린거지만요.

    그리고 보스푸러스 해협은 운하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거지 운하가 아니에요.
    34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9-26 19:52:47 0 삭제
    내꿈은컴퓨터/
    상호간에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군요.

    일단 인간끼리의 친구관계. 그것이 이익관계가 아니라고 보십니까?
    사람은 정신을 발전시키고 맹수들과 자연변화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즉 무리를 짓지 않는 짐승들에 반하여 사람은 무리를 짓는다는것이죠.
    하이애나가 무리를 짓는것과 사자가 무리를 짓는것도 그런 생존진화에 일환입니다.
    사람이 사람없이 생존할 수 있을까요?

    생존이란건 자아또한 필수요소입니다.
    식욕.수면욕.성욕만 충족된다고 해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가.
    미치죠. 혼자 있으면 미칩니다.

    즉 친구사귐도 사실은 우리의 자아를 향상.혹은 보전하기 위해 사귀는겁니다.
    글쓴이께선 친구관계를 뭔가 생존에 포함되지 않는 특별한것으로 보시는군요.
    저는 사랑이던 친구던 이상이던 모든것이 생존에 파생된 파생형으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근원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생존이 나타난다는것이죠. 존속하려는 본능이 나타난다는겁니다.
    여튼 여기서 글쓴이님과 저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나옵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저는 사치또한 부정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자아가 존속하기 위해서라면 일정도의 사치또한 허용하는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사치를 하나도 안하고 근검절약하며 살다가 미치면 뭐합니까? 미치면 소용이 없는데요.
    신체육신의 보존뿐만 아니라 자아정신의 보존도 중요한다고 생각하는것이죠.

    단지 사치라는것이 신체육신의 보존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하는것은 부정합니다. 신체가 먼저고 자아가 다음이니까요.
    하여튼 글쓴이님과 저는 극복하는 간극이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친구를 어떻게 놓느냐에서 글쓴이님은 생존에 포함되는걸로 보시지 않으니까요.
    33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9-26 11:40:28 0 삭제
    내꿈은컴퓨터/
    [악어새와 청소물고기는 청소행위가 없어도 먹고 삽니다..하지만 청소행위를 하는 것은 진화과정에서 친밀함이 형성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친밀함을 정의해야겠군요.

    악어새와 청소물고기가 청소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게 적은 위험에 큰 보상이 따르는 짭짤한 부업이기 때문이죠.
    현재 인간과 개의 관계에서 인간이 개를 키움으로 얻는 짭짤한 보상이 있습니까?
    위로. 반려견. 뭐 이런것은 각 개인의 편차이고 인간전체 종으로 볼때에 이제 개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었죠.

    미트콘드리아와 원세포의 작용도 친구관계.
    그 둘은 상호가 같이 있을때에 막대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둘이 떨어지면 효율은 1/10이하로 급감하죠.
    즉 상호간에 절대적 이익이란 말이죠.
    32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9-26 10:29:27 0 삭제
    내꿈은컴퓨터/
    확실히 모호한것이 형체를 띠는것이군요.
    악어와 악어새. 곰치와 청소물고기의 관계를 쓸때까진 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죠.

    여기서 가장 중요한게 있습니다.
    악어와 곰치는 강자죠. 만약 악어와 곰치에게 악어새와 청소물고기가 더 이상 자신의 생존에 효용을 주지 못한다면
    그들을 잡아먹지 말아야할 이유가 악어와 곰치에게 있을까요?
    가령 어떤 개체의 악어와 곰치는 악어새와 청소물고기를 잡아먹었을겁니다. 몇백만년전엔 말이죠.
    아직 확고한 공생관계가 자리잡기전에 말입니다.
    그들은 그 행위로 그 무리와 그 영역에서 청소물고기와 악어새는 청소활동을 안했을테죠.
    그리하여 치아가 상하는 생존에 매우 심대한 위협으로 인하여 생존이 불리해져 도태했을겁니다.
    그렇게 완성된게 현재의 악어와 악어새. 곰치와 청소물고기의 공생관계입니다.

    글쓴이께선 공생관계와 친구관계를 구분하라고 했지만 이렇듯 공생관계도 시작할때엔 그 종에 각 개체에 다른 발현이 있었지요.
    그게 생존이란 거대한 장안에서 위협으로 작용한 개체는 죽어서 결국 그 종엔 그 관계가 유전자에 각인된 종만 살아남았다고 보면 됩니다.
    인간과 개의 관계
    인간과 개는 정확히 1만5천년 전부터 공생관계였습니다.
    수렵채집을 하는 인간의 부산물을 보고 늑대에 한 아종이 인간의 무리를 뒤따르며 그것을 먹으면서 인간 생활권에 들어왔죠.
    그리고 인간에겐 잠을 잘때에 맹수에 의한 위협에서의 보호로서 또한 사냥할때에 매우 유용한 추적자의 역활을 했습니다.
    즉 두종이 생존필요에 의하여 대타협을 통해 이런 관계로 발전했다는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인간=악어의 역활로 강자적 존재고 개는=악어새의 역활이로 약자입니다.
    이 관계가 깨진건 현대사회가 이미 1만년전부터 수렵채집사회를 벗어나 6천년전부턴 수렵채집사회에서 거의 탈피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더 이상 개의 악어새로서의 활용성이 사라진겁니다.
    그럼에도 약 1만년간에 공생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인간또한 개의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것이죠.
    고양이도 쥐를 잡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 관계가 5~6천년밖에 안되기에 개보다 더 강한 친밀감을 인간종족 전체적 평균치로 느끼지 못하는겁니다.
    결국엔 누가 악어고 누가 악어새이냐 차이죠. 인간이 악어고 악어가 더 이상 악어새가 없어도 치아관리를 잘 받게 된겁니다.
    그게 현대사회에 개와 인간의 관계입니다.
    31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9-25 16:55:47 0 삭제
    친구 자체가 정의가 안되있는듯 합니다.

    1.1. 친구(brother)란 친밀함(brotherhood)이 만들어낸 특수한 관계다. 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살펴봐야죠.
    가령 자연계에 친구관계라고 볼만한것은 악어와 악어새. 청소물고기와 큰 물고기들이라고 보이죠.

    이들이 "친밀함"으로 엮여있느냐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모두 악어새와 청소물고기가 없으면 치주염이던가. 충치가 생겨서 생존에 심대한 위협을 받습니다.
    악어새와 청소물고기는 청소행위가 없어도 먹고 삽니다. 입안 청소를 해주는건 "짭짤한 부업"에 불과하죠.
    그에 반해 악어와 큰 물고기들은 악어새와 청소물고기가 없으면 생존이 원활하지 못하며 제약을 받습니다.
    즉 일방관계에서 악어새와 청소물고기가 우위에 있단 뜻이죠.

    개와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개가 우리의 생존을 원활하게 하는 존재며 없으면 생존이 위협된다면 개를 죽이는건 어느 문화권이라도 지탄받을 대상이 될겁니다.
    가령 한국에서 말고기를 먹긴 했지만 되도록 먹지 않도록한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군사물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음에

    1.1.1. 인류의 친구를 판단하는 근거는 인류적 가치의 보편성이다.

    1.1.1.1. 인류적 가치의 보편성은 명증하지 않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아닙니다.
    보편적 가치가 있죠. 바로 생존입니다. 생존은 생물체 모두의 보편가치를 형성하죠.
    인류적 가치라고 했는데 인류적 가치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회? 사회는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시스템입니다. 그게 유전요인까지 결정지어 사회적 개체만 남아
    인류는 선천적으로 날때부터 사회적 본능을 가진 종이 됬죠.

    인류보편적 가치 또한 인류의 생존을 유리하게하거나 절대 필요한것이었단 뜻이죠
    생존과 윤리를 나누는것은 넌센스라고 봅니다.
    생존이 가장 큰 바탕을 이루는것이고 그 위에 윤리가 따라왔을뿐 윤리는 생존과 같은 위치에 놓일 명제가 아닙니다.
    30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4 14:01:57 0 삭제
    [그러고선 밑에사 마직막에 도달할땐 욕망을 버리고서 라고하다니 거 말장난이 너무심하오]

    그러니까. 욕망을 절대 버릴 수 없는겁니다. 자기자신은 버리지 못해요
    절대로 석가모니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반야바라밀다.
    제가 말하는걸론 뉴런패턴화를 통해 생각을 의식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뉴런이 자연히 그런 사고패턴을 작동시키는것
    말하자면 생각하는 과정과 관찰하는것. 정리해보는것 그 외에 모든것들이 다 숨쉬기처럼 본능수준에 뉴런패턴화가 일어난다는겁니다.

    마치 습관이 되면 습관적으로 무엇을 행하듯이요.
    숨을 쉬자. 라고 생각해서 쉬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거나 그런것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데 그 욕망의 추구가 뉴런패턴화를 불러오고 그게 완성된게 붓다란겁니다.
    그게 완성되는 순간에 욕망을 그 뉴런패턴이 관찰하게 된다는것이죠.
    그걸 욕망이 끊어지다라고 하겠죠.
    즉 자기자신이 결심해서 끊는게 아니라 습관을 넘어서 본능영역수준으로 들어간 뉴런패턴이 욕망을 끊는다는겁니다.

    가령 예를 들면 묶여있는 개가 뼈다귀를 보고 그걸 먹으려고 발버둥을 칠때 목줄이 나중에가선 끊어지는것과 같습니다.
    개가 목줄을 끊고자 한게 아니죠. 뼈다귀를 먹고 싶어했을뿐.
    그렇기에 붓다가 대단히 되기 어렵단겁니다. 왜냐하면 목줄 반경안에. 즉 욕망 반경안에도 이를 수 있는것이 많으니까요.
    그 목줄이 끊어버리는 자들은 "존재의문과 생사고뇌에 질문에 완전한 답. 흔들리지 않는 답을 알고 싶다"로 인해서 미친듯이 달리는겁니다.
    일반인에겐 보이지도 않은 뼈다귀를 향해서요.

    그래서 마지막에 끊어지는것이죠. 그걸 원력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욕망을 끊겠다"해서 출가한게 아닙니다. 6년 수행을 그리한것도 아니고요.
    석가모니가 고행한건 자신이 원하는 답을 그러한 고행과 여러 방법들이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시도해본것이죠.
    그래서 석가모니가 고행이 몸을 해친다고 제자들에게 고행을 추천을 안한겁니다.

    대단한거에요
    자이나교도 고행주의였습니다.
    인도에 두가지 틀인 카스트제도와 고행중에 자이나교는 카스트를 부정했으나 고행은 오히려 원래 인도보다 훨씬 심화됬으나
    불교는 카스트제도와 고행을 모두 배격.부정했습니다.
    카스트제도는 부정했고 고행은 배격했죠.

    그게 다 붓다가 목줄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위에도 말했지만 욕망을 끊어진것은 깨달은자에 대한 감상문이지.
    깨달음을 추구하는자에 상태를 말한게 아닙니다. 달라요. 깨달은자와 깨달음을 추구한자는 상이하게 다릅니다.
    29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4 13:49:50 0 삭제
    lastlaugher/
    석가모니가 수행할때 "욕망조차 버려야 궁극적 깨달음"이란게 있었습니까?
    석가모니가 불교의 창시자인데 인도의 전통은 고행주의입니다.
    고행을 통해 신과 같이 된다는것이죠.

    욕망조차 버려야 궁극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불교는 아예 탄생도 못합니다.
    석가모니가 없는데 어떻게 나옵니까.

    그리고 욕망을 버린다라는것이 "자기 자신의 의식과 인지"가 아니란겁니다.
    위에 말하지 않았나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라고 한다고요.

    제가 그 무언가라고 칭한 반야바라밀다는 제가 보기엔 사고패턴의 완전한 확립입니다.
    즉 생각한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아도 뇌가 스스로 그 사고패턴을 행하는것
    이게 바로 "반야바라밀다"라고 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자신이 결심하지 않아도
    이것이 사고패턴. 뉴런패턴화되어서 계속 작동하는 도중에 완성될때에 자연히 욕망이 끈어진다는것이죠.

    좀 안타깝습니다.
    불교를 접하는 많은 분들이 님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욕망조차 버려야 깨달음에 이른다"라고요. 이걸 보면 쇼펜하우어에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그걸 비법상이라 부르고 비법상에 집착해도 곧 법상에 떨어진다고 하는겁니다.
    한번 금강경을 시간나서 심심하시면 심심풀이로 보시길 바랍니다.
    28 일반적 욕망과 종교적 욕망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새창] 2014-09-23 23:51:37 0 삭제
    [왜냐하면 현재 우리 지구에서 유일한 희망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떤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요.
    예전에 짐승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지구의 유일한 희망은 인간이다]라고 했죠.

    왜냐면 인간의 현재 과학기술력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고 태양 플레어나 운석충돌같은 경우엔 만년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인간의 기술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끝이에요.
    어떻게 막을겁니까. 전 우주적 재난이 발생했을때 짐승들이 언제 진화해서 언제 지성얻고 언제 그걸 막고 있나요.
    보장이 없어요.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지구에 자신의 고향이란 의미를 둘것이고 또한 살아갈것임으로 우주적 재난에서 지구를 지켜내려 할겁니다.
    또한 그 수준이 되면 더 이상 석유파먹을리가 만무하고 상온핵융합 기술도 과거의 기술이 될거니
    지구의 자원에 더 이상 얽메일 필요가 없어요. 우주에가서 자원을 캐오면 되죠.
    그렇기에 그때가 온다고 치면 인류는 지구상에 종들을 보존하려 할테고 그들을 보호해줄테죠.

    뭐 부정적으로 보면 그 이전에 인간의 탐욕으로 모든종이 다 죽을 수 있고 지구도 멸망.파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야 당연히 몇세기도 못가서 종말될테고 말이죠. 여튼 그런 동전의 양면이죠.

    우주적 재난앞에서 현재 상황하에선 인류가 그나마 가장 희망입니다.
    짐승들은 인류가 없으면 그냥 운석맞고 죽는 수 밖에 없지요.

    그때 [인류가 지구의 희망이다]라고 말했던거 같습니다. 뭐 이 주제랑 상관은 없는듯 하지만요.
    27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3 23:31:03 0 삭제
    윤회라는게 실제론 자신의 내면안에서 그렇게 수 없는 견해와 주장들이 박살나고 다시 시작되고 하는것을 말하는겁니다.
    생각이 태어났다 멸함을 수 없이 겪는거에요.
    우리가 지금 겪는것처럼 "아님 말고"가 아니라 그 순간엔 생존욕이 그 해답을 찾는데 몰려있어서 의심이 다시 찾아와 생각을 박살을 내버리면
    자신의 내면안에서 정말로 죽을듯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화두선을 권하지도 않고 이걸 권하는것 자체를 무의미한짓이라고 하죠.
    십중팔구는 화두를 들어도 저 순수한 상태로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 만큼 "절실"하지 않으니까요.
    쥐가 구석에 몰려서 구멍을 발견하는게 화두선이에요. "이게 살길이다"라는 생각이 생각하지 못할정도로 기본 베이스에 깔려야 시작됩니다.
    이것의 자신의 죽음. 존재의 소멸에서 벗어날 길이다! 라는 기본 밑바탕이 깔려야 화두선이 시작이 되는겁니다.
    그 이전엔 시작조차 안되요. 그냥 이야기만 하는거지. 수행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 조계종이 화두선을 중심으로 잡는것이 참 미련하게까지 보입니다.
    일반인이 가장 쉽게하며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는건 염불선이에요.
    내가 화두선으로 유사견상을 해봤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보니 정말로 이건 초심자에겐 권할게 아닙니다.
    효력이 없어요.

    기독교에서 기도하잖아요.
    염불선에서 주력을 외는것이나 기도를 하는것이나. 실제 기도는 도교에서 유래한 말이지만요.
    여튼 저게 가장 진입장벽도 없고 편하면서 효력도 빠르게 볼 수 있는겁니다.
    단지 꾸준히 오래해야 일정단계를 넘어가는데 그러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문제일뿐이죠.

    근데 일반인에게 염불선 하라고 권해주면 "난 신을 믿지 않는다!"라면서 말하죠.
    그러면 제가 간단하게 권합니다.
    신을 부르지도 주력을 외지도 말고 너의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불러라. 그것도 효력있다. 라고 하죠.
    주력이란게 별거 없어요.
    옴마니반메훔이나 아미타불을 외면 왜 효과가 나오냐면 사람이 그걸 어디서 배웠던 기존종교에 힘으로 인하여
    그 사회에 기존종교에 힘말이죠. 그로 인해서 그걸 "신성한것. 뭔가 상위차원에것. 착한것." 뭐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요.
    실제로 생각이 그쪽으로 몰리도록 하기 위해서 주력을 외는거지. 옴마니반메훔이나 아미타불에 쥐뿔같은 뭐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르는것도 당연히 효력이 나와요.
    너무 아련하게 부르지 말고 어머니. 어머니 하던가 해도 마음속으로 그렇게만해도 생각이 "따듯한것. 모성. 착한것" 뭐 이런것에 몰리게 됩니다.
    주력을 하는 이유 자체가 일단 "생각을 모으는 법"을 뇌가 읽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일뿐이에요.
    거기에 보조효과로 그 사람이 좋은걸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을 한다는것이죠.
    26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3 23:15:26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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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를 시켜줘서 되면 좋겠죠.
    그렇게 될수도 없고 자신이 찾아 얻어내지 못하면 소용도 없는겁니다.

    일단 원력이 모자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조 혜능은 금강경의 구절 하나만 듣고 깨쳤다고 하지요. 그게 사실 어떻게 금강경을 듣고 깨쳤겠습니까.
    거의 다 깨놓은 알껍질이 아주 약한 압력에 부서져버린것과 다름이 없지요.

    근본적으로 뇌 차이라고 봅니다.
    붓다가 될만한 뇌와 아닐만한 뇌의 차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 뇌만 가지고 되느냐고 하면 또 그건 아니라서 환경적 요인도 작용을 해야 합니다.
    불경에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붓다라 세상에 나오는건 희유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매우 희귀 희유 희소하여 타고난 뇌에 알맞은 환경에 딱 맞는 인연이 겹쳐야만 되는겁니다.

    일단 예전에 한번 경험한 그 유사견성 조차도 다시 경험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고개가 가로지어집니다.
    그것을 시작하려면 이렇게 앞뒤재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기하게도 화두참선이 시작되기전까진 여러 의심들이 막 일어나는데요.
    시작될때엔 "아무도 모르는구나. 그 누구도 모르는구나!" 하면서 "내가 찾을 수 있다. 인류 처음으로 내가 찾을 수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요.
    진짜로 100% 그렇게 믿는다는겁니다. 스스로.

    그럼 아주 기분이 기쁩니다. 마치 한량없는 재물을 약속받은이마냥 아주 기쁜마음이 넘쳐나죠.
    그런 기쁜마음이 있기에 그 이후에 끝 없는 질문들에 솔직히 대면하고 저항하며 견딜 수 있는겁니다.
    그리고 유사견성은 별거 없어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깨달음의 기쁨이 정말로 말도 안된다고 말하죠.
    견성의 순간에 기쁨 말이죠.
    그게 다 뭐냐면 간단해요. 님을 괴롭히던 문제. 정말 내면에서 눈물 콧물 짜내면서 예수에게 부처를 팔고 부처에게 하늘을 팔고 부처에게 예수를 팔며
    나중에 가선 하늘에게 모든 신을 다 팔고 예수에게 다시 붙어서 모든 신을 다 팔고 이러는데요.

    그 괴로움을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씩 겪다가 자신이 맨 처음부터 알던 답이란것을 눈치채면 그때 기쁨을 누리는겁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지옥에 가둔다음에 다시 지상에 꺼내면 그 사람이 한량없는 기쁨을 주체못하는것과 마찬가지에요.
    그 기쁨은 이 세상에 어느 즐거움에 비견할 수 없죠. 최상의 즐거움의 백배는 넘는다고 봅니다.
    해방됬으니까요. 이제 괴로움에서 해방됬으니까요.
    그 문제에서 자신은 해방되고 그 물음에서 자신은 해방되었기에 기뻐하는 겁니다.

    그래서 붓다가 뭐냐 하면
    상상력을 초월하는 지옥.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는 그 괴로움을 머리속에서 겪다가 해방됬기 때문에요.
    그래서 붓다가 자신의 죽음조차 담담하게 말하는겁니다.
    일반인을 붓다를 만드는방법이 아주 간단해요.
    그냥 끝나는지 끝나지 않는지 조차 알수없이 죽었다가 다시 아이로 태어나게 하면 됩니다. 기억만 보존한체로요.
    그럼 부처되요.
    25 진실을 알던 모르던 달라지는건 없습니다. [새창] 2014-09-23 21:01:58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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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야 확정을 짓지 않으면 생각이 진행이 안되니 그렇습니다.
    전에 댓글에도 달았지만 혼자서 생각할때에 한가지 명제를 던지고 숙고한뒤에 하나를 택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둘중에 무엇이 옳은가. 혹은 둘이 아닌 다른 가능성은 없나"만 하루 종일 생각합니까.
    그건 회의론자가 "이 밥이 진짜인가. 가짜인가"하면서 굶어죽는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혼자서 생각자체를 할수가 없어요.
    24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3 20:09:46 0 삭제
    그리고 저 마지막 순을 잘라버리는것은 사람의 인지작용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무언가의 힘이 잘라버리는거에요.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체요.
    이건 사람들이 말하는 자살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일입니다. 자살은 실제로 살라고 그러는거에요.

    생명체는 외부압박을 받으면 회피하거나 투쟁하는데 자살은 삶을 외부압박으로 느끼고 그래서 삶에서 회피하려고 자살하는겁니다.
    목숨을 끊지만 실제로 "본능"이란 장엄한 장치안에서 일어나는 삶의 추구에서 비롯된것이에요.
    즉 살려는 욕구에서 자살이 나온다는 겁니다.

    근데 석가모니가 한 행위는 그게 아니에요.
    진짜로 잘라버리는겁니다.
    그래서 이걸 반야심경에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라고 표현합니다.
    즉 자의로는 못 끊다는겁니다. 절대로요.
    간절하게 추구할때 그 간절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인간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도 그를 놓지 않고 간절히 추구할때.
    간절히 욕망할때. 욕망조차 무언가에 의해서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23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3 20:02:14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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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깨달으면 소멸되지만 깨닫기전엔 반드시 추구함으로 인하여 욕망이 생성된다는것이죠.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관념조차도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진정한 깨우침인데 이를 어찌 욕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이것 자체가 욕망입니다.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관념조차 없어진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이게 깨달음에 대한 상에 불과합니다.
    이를 금강경에서 비법상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갈때엔 당연히 욕망함으로 가고 마지막에 도달하여 욕망을 버리면서 각기 다른 형태를 가지게 되는데
    예수의 경우엔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고 마하비라의 경우엔 자신의 경지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즉 나머지 욕망을 끊어버리고 무엇 하나를 선택하여 그 형태를 띠고 세상에 나온다는것이죠.

    마지막에 도착하여 각기 선택하는 형태가 있는데 그게 무지막지한 힘을 부여받는것이지요.
    붓다의 경우엔 여기서 "모든것이 확실하지 않다. 이것이 아닌 완전한 진리를 알고 싶다. 알고 싶다"를 추구한겁니다.
    불경에 붓다가 죽을 보시받고 5사문에게 모욕받고 명예조차 잃어 무엇도 남지 않은 마지막 선정에 들어갔을때 석가모니가 말한게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세상의 진리를 깨우쳐 대단히 행복이 충만한 마음을 느낌을 6번이나 경험했다는겁니다.

    경전에서 붓다가 말하길 자신은 그것을 경험했으나 들뜨거나 즐거워하지 않고 "관"했다고 합니다. 냉철하게 관했다. 라고 스스로 말하죠.
    그게 무슨 말이냐면 견성이나 해탈을 무려 6번을 연속돌파했단 겁니다.
    제가 견성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화두깨친바가 있어 경험해봐 아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에요.
    화두가 깨지면 굉장한 충만한 행복감이 듭니다. "이제서야 알았구나. 지금에서야 모두가 아는걸 알았구나. 나만 몰랐구나"이런 생각이 들면서요.

    즉 석가모니께서 이미 6년의 고행중에 몇차례 이런 경험을 했단겁니다.
    근데 이것이 정녕 자신이 찾던 진리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던거에요. 의심이 난거죠.
    그래서 그렇게 굶어죽을 수 있는것이 그저 마음먹기에 달린 석가모니께서 공양을 받은겁니다.
    이걸 사람들이 부처도 살라고 먹었구나 생각하는데 석가모니는 그때에 자이나교에 마하비라처럼 죽는것이 매우 쉬웠습니다.
    또한 5사문들도 고행자임으로 그렇게 죽는걸 "명예"라고 생각했지요. 그럼에도 석가모니가 이에 반기를 든겁니다.
    세상에 가장 강력한 힘인 명예에 반기를 들고. 그것고 세속의 명예가 아닌 종교의 명예에 반기를 들고 모욕을 당하더라고 보겠다는 겁니다.
    모르니까. 이게 정말로 자신이 찾던것인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마지막 선정에 이르렀을때에 이 해탈에 경지에 들어섬을 6번이나 경험하면서 들뜨며 합일되지 아니하고 자신을 분리해 바라봅니다.
    관찰했단 것이죠. 이것 대단한거에요.
    여기서 저는 조카들에게 말하길 "글렀네. 부처되긴 글렀어"라고 합니다.
    "난 작은 화두에 파편을 알아채 거기서 어마어마한 행복감을 느꼈고 그 이후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는데 고타마 싯다르타는 인간이 아닌거 같다" 라고 하죠.

    저번에 kbs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과학자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천국의 경험을 하고 난뒤에 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테드를 보면 어떤 과학자가 뇌졸증을 겪어 좌뇌와 우뇌가 통하는것을 느끼고 그 행복감. 나와 너가 없는 그 행복감을 니르바나라고 칭하더군요.
    틀렸습니다.

    붓다는 명철하게 보는 자에요.
    행복감을 느끼며 그에 일체화되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매우 특색있게 생각합니다. 근데 사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면서 존중하는것이지.
    실제론 "뭔 소리여"라는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잘해봐야 쇼펜하우어가 불교를 허무주의로 이해한 수준에서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거에요.
    모든 욕망의 가지치기에서 예수가 하나의 순만 남겨두어 거기서 대단한 수박이 열리게 한것이고
    마하비라가 참외가 열리게 한것이라면
    붓다는 마지막 순마저 잘라버린겁니다. 그리고 본거에요.

    이 순이 올라오는 모든 작용들. 영양분이 뿌리에서 어떻게 시작되어 순에 공급되는가까지 모든걸 보게 되는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붓다를 이렇게 칭합니다.
    모든것을 알고 싶어 신과 같은 힘을 상실한자.
    22 종교인이 욕망이 거세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이 엄청커요. [새창] 2014-09-23 17:34:50 0 삭제
    lastlaugher /
    일반적 욕망과 종교적 욕망은 없습니다.
    다 똑같은 욕망에 불과해요. 무슨 종교적 욕망은 대단히 다를것이라 생각하는것이 종교인에 대한 그릇된 시선만 만드는겁니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결국엔 육신의 향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것에 불과한거죠.
    또한 이게 정신이 발전하다보니 자아의 향상성까지 유지하게 만드는것이 욕망입니다.

    욕망을 구분한다. 도대체 종교적 욕망과 일반적 욕망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숲님이 말씀하신 존재의 두려움이란 왜 생기는걸까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의 죽음"을 상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존재의 두려움이 생기는겁니다.

    즉 지성이 "향상성의 깨짐"을 알아차리고 그 순간에 욕망이 형태를 변이하기 시작한다는것이죠.
    가령 재벌이 되고자하는 욕망이 종교적 욕망과 과연 다를가요?
    사회의 높은곳에 올라가 세상에 힘인 금력을 차지하여 "자신의 향상성을 유지한다"인겁니다.
    그러니 재벌이 되고자 하는거에요.
    거기서 더 발전하기 시작하면 명예욕으로까지 들어와서 "내 향상성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향상성까지"가 됩니다.

    재벌들이 매일 말하는 국민경제신장과 민족번영이 이런것이에요.
    여기까지 오기 시작하면 굉장히 구분이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저 재벌에 욕망과 수행자의 욕망이 다를가요.
    본질은 같습니다. 단지 재벌의 욕망은 자신의 향상성. 가족의 향상성. 가문의 향상성으로 여러가지 분산되어 있고 회사.국가.민족으로 나눠져있죠.
    수행자는 이 모든게 "자기자신"에게 쏠린겁니다.
    자기자신의 영원을 찾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 영원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 존재의 의문과 생사의 고뇌의 답을 알기 위하여.
    이게 수행자와 재벌의 차이일뿐이죠.
    근본은 같은데 그 방향과 집중에 차이가 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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