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연기의 가르침
여러분 도 잘 아시겠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12연기입니다. 연기법은 반드시 12연기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셔야 합니다. 연기를 구성하는 요소가 열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냥 연기법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아니고 12연기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다라는 겁니다. 12연기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세 가지 영역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 번째가 연기의 성립 근거입니다. 여기서의 연기는 전부 12연기를 말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홀연히 연기가 생겨난 것은 아니고 무엇인가 근거가 있고 그 가운데서 연기가 성립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연기의 발생양식입니다. 무엇을 연기라고 하는지 연기의 뜻을 묻고자 하는 겁니다. 연기는 인연(因緣)의 뜻으로 새기는 것은 아주 미약합니다. 이 부분은 하나의 범주로 나누어서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세 번째는 연기지분의 참된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12연기를 공부할 때는 이렇게 세 범주로 나누어서 공부해 들어가면 비교적 알차게 공부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연기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차제성(次第性)에 입각한 성립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실상(實相)이라는 차원에서 성립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12연기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12연기에 선행하고 있는 법문들이 차례 차례 순서에 맞게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처음부터 단박에 연기를 깨달을 수는 없는 겁니다. 12연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고 있고 얼마나 그 깊이가 깊은 것이기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12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할지언정 상당히 깊이 있는 가르침이구나 하는 공감대는 형성해야 한다고 봐요. 차제성(次第性)이라는 것은 차례를 말하는 거지요. 12연기라는 가르침이 오기 전에 선행하는 단계들이 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선행하는 것들은 12처(十二處), 육육법(六六法), 오온(五蘊)이라는 단계입니다. 이것들이 12연기의 성립근거가 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12처의 가르침은 반드시 육육법의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되며 육육법은 오온이라는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되며 오온의 가르침을 숙지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12연기를 공부할 수 있는 그러한 차례를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넓은 바다에 비유하십니다. 불법대해(佛法大海)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바다가 넓어서 불법에 비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법은 바다와 같다. 바다가 점점 깊어지듯이 나의 법도 점점 깊어지느니라. 따라서 나의 법을 큰 바다에 비유하느니라.” 이러한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그것을 아주 중요한, 불법을 보는 안목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박에 깨친다는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12연기의 가르침은 12처, 육육법, 오온이라는 차제적 접근에 의해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12연기부터 배우려 들면 큰일납니다. 두 번째, 실상으로서의 성립근거,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난 번에 오온을 공부할 때에 잠복현현(潛伏顯現)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구조〔계층 구조, dhatu〕를 상정했습니다. 이와 같이 12연기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실상의 구조를 전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실상의 구조를, 밝을 명자를 써서 명(明)이라고 부릅니다. 12연기의 성립 근거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12처, 육육법, 오온이고, 상의 차원에서 성립근거는 명(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을 실상의 구조로 하여서 똑같은 논리가 적용됩니다. ‘명’이란 ‘비드야(vidya, vijja)’라고 해서 ‘실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명이란 ‘밝히다’〔동사〕라는 뜻입니다. ‘밝다’〔형용사〕라는 뜻보다는 ‘밝히다’라는 의미가 정확한 것입니다. 명의 세계란 어떤 세계입니까? 그것은 실상의 세계입니다. 실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실상은 생사(生死)가 초월된 세계입니다. 생사를 가장 완벽하게 초월한 형태가 무엇이냐 하면, 밝힘의 뜻을 가진 명(明)입니다. 저것이 바로 12연기의 성립 근거입니다. 따라서 먼저 명의 구조에 대한 명료한 파악이 있어야 연기의 공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 주셔야 합니다. 다음은 연기의 발생양식은 무어냐 하면, 연기라는 말 자체가 그 발생양식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연기(緣起)라는 말은 번역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 애매 모호합니다. 연기의 원어는 ‘프라티이트야 쌈우뜨파다(pratityasamutpada)’입니다. 연기를 공부할 때 차제성의 입장에서 성립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12처, 육육법, 오온이라고 했습니다. 12처는 별 문제가 아닙니다만, 육육법에 오면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그랬을 때 육육법의 가르침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뭐가 있느냐 하면, 육육법은 예를 들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육촉(六觸)→육수(六受)→육상(六想)→육사(六思). 여기에서 화살표가 뜻하는 것이 굉장히 미묘합니다. 화살표가 뜻하는 것을 원어로 도식화시키면 ‘프라티이트야 우뜨파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프라티이트야’라는 말은 ‘프라티+이+트야’가 결합된 형태예요. ‘프라티’는 ‘∼에 대하여, ∼을 향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는 ‘가다’라는 뜻이고, ‘트야’는 ‘∼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프라티이트야’는 ‘∼을 향하여 가서’라는 뜻이 되죠. ‘∼을 향해’ 가려고 하면 몇 가지가 필요하겠습니다. 최소한 ‘향해 가는 자’와 ‘향해 가는 대상’이 필요하겠죠. ‘프라티이트야’는 ‘기댄다, 의존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육촉을 연하여 육수가 있다’라고 할 때의 ‘연(緣)하여’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우뜨파다’는 무슨 뜻인가 하면, ‘우뜨’는 ‘위〔上〕로’라는 뜻이고, ‘파다’는 ‘가다’라는 뜻입니다. ‘위로’라는 뜻은 ‘일어남, 발생함’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그래서 ‘프라티이트야 우뜨파다’라는 말은 ‘기대어 일어남’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연기(緣起)’라는 말의 가장 초보적인 뜻이 바로 ‘연(緣)하여 일어남〔起〕’입니다. ‘연(緣)한다’는 말은 ‘기댄다’는 뜻입니다. ‘일어남’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위〔上〕로 감’이라고 했습니다. 위로 간다는 것은 ‘아래〔下〕’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무엇인가에 기댄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보았을 때, ‘기대는 자와 기대어지는 대상이 있겠구나’ 하는 것과 ‘아래와 위가 있겠구나’ 하는 것이 느껴져야 해요. 연기라는 말 자체에서 아래의 세계와 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무엇인가가 무엇인가에 기대어서 아래의 세계에서 위로 간다’는 것이 연기의 뜻입니다. 이것이 육육법을 공부하면서 얻게 되는 제법(諸法)의 발생양식입니다. 육촉→육수→육상, 이러한 순서로 나타난다는데 육촉 다음에 육수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육수는 육촉을 기대어서 위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무엇인가가 밑에 있다가 위에 있는 육촉을 붙들고 위로 올라가 버렸다고 하는 그런 흐름을 그려볼 수 있겠죠. 여기서는 ‘기대어 일어남, 혹은 올라감’이라는 발생 과정을 통하여 육촉과 육수와 육상은 세상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에 기대어서 어딘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육육법의 발생양식입니다. 기대어 일어난다, 원어로 말하자면 ‘프라티이트야 우뜨파다’입니다. 그럼 오온은 어떻게 발생합니까? 육육법이 기대어서 올라간다고 한다면, 묘하게도 오온은 서로 의존하는 일은 없어요. 오온의 발생양식을 드러내는 부처님의 말씀은 고집멸도 할 때의 집(集)이 오온의 발생양식을 이야기해요. 이것을 경전에서는 ‘연생(緣生)’이라고 합니다. 육육법의 발생양식은 연생이다. 오온의 발생양식은 ‘집’이다. ‘집’이란 무엇입니까? 원어로는 ‘쌈우드아야’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함께 올라감’이라는 뜻입니다. 집(集)이라는 말의 뜻은 함께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생’이라는 말의 뜻은 기대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기대어 올라감에는 ‘함께’라는 뜻이 빠져 있고, 함께 올라감에는 ‘기댄다’라는 뜻이 빠져 있습니다. 육육법의 발생양식은 A와 B가 서로 기대기는 하되 함께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온의 발생양식은 A와 B가 함께 올라가기는 하되 기대는 것은 없어요. 그냥 평등하게 올라가 버리는 겁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올라가는지가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은 알 수가 있어요. 저번에 오온을 얘기할 적에 위와 아래의 존재를 상정했지요. 이런 것이 전부 올라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전제가 깔리는 겁니다. 오온의 발생양식은 경전에서 집(集)이라고 부르는데, ‘쌈우드아야’라고 했지요. 여기에는 함께 올라가되 기댄다라는 과정이 빠져 있고, 육육법의 발생양식은 연생이라고 규정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함께’라는 과정이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육육법의 발생양식은 연생이고 오온의 발생양식은 집인데, 12연기의 발생양식은 ‘프라티이트야 쌈우뜨파다’, 기대기도 하고 함께 일어나기도 하는 겁니다. 12연기의 가르침은 오온이나 육육법의 완성 형태라는 걸 아시겠지요. 육육법을 가르치면서 기대어서 올라간다는 것을 마스터하게 만듭니다. 함께 올라가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일단 의존해서 올라가는 부분을 철저히 가르친 부분이 어디냐 하면 육육법이에요. ‘프라티이트야 우뜨파다’만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함께 올라가는 걸 가르치는 것이 오온설입니다. 그 때는 함께 올라간다는 것이 집중적으로 가르쳐져요. 색수상행식은 늘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데 12연기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의존도 하고, 함께 아래로부터 위로 가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분과 지분들이 어떻게 서로 의존하면서 함께 올라갈 수 있는가? 대개 의존하면 함께 못 올라갑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하나가 당겨지면 하나는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하나가 올라갈 수 있지, 당기는 것이나 당겨지는 것이나 동시에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문제거든요. 육육법은 육촉, 육수, 육상,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데, 육수라는 것은 육촉에 의존하여 올라가기만 합니다. 육촉과 육수가 함께 올라가지는 못해요. 이 때는 기대는 작용만 있으니까. 그러나 오온에 오게 되면 색수상행식은 서로 기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함께 올라가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연기에 오게 되면 행과 무명은 어떤 관계냐 하면, 행이 나타나려면 일단 무명을 의존해야 돼요. 의존한 다음에 그 무명과 함께 올라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육육법의 경우 전후의 지분은 단순히 의존하여 발생하기만 하고 오온의 경우 의존관계는 생락된 채 함께 올라가는 데에만 두드러진 발생법 상의 특징을 보입니다. 그러나 12연기에 오면 뒤의 것은 앞의 것에 의존도 해야 되고 의존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밑에서 위로 올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프라티이트야 쌈우뜨파다(pratitya-samutpada)는 순수하게 우리말로 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대어 함께 올라감’이라고 해석될 거예요. 연생(緣生)은 ‘기대어 올라감’, 집(集)은 ‘함께 올라감’, 연기(緣起)는 ‘기대어 함께 올라감’, 이러한 발생과정에 있어서 점점 무언가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12연기를 다룰 때 두 번째 주제로 등장하는 연기의 발생양식에 대한 접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연기의 지분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열두 가지가 있어요. 이러한 열두 가지의 뜻이 뭐냐, 우선 처음의 무명부터 살펴보면 됩니다. 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쉽게 풀이해본 것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무명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無知)이다.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착각일 수도 있고 일시적 형체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꿈 속에서 제왕의 자리에 오른 자는 그것이 꿈 속의 일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은 흩어질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한 채 크게 기뻐하며 집착한다. 그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변하며 흩어지고 마는 것인데도 그 진리를 모르는 자는 어떤 존재가 나타내는 일시적인 모습에 빠지게 된다. 즉, 사실은 영원하지 않음에도 영원하다고 착각한 채 강하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명이다.” 명이라는 구조를 상정해 볼 때 거의 물과 같습니다. 물은 형체를 떠난 적이 없지만 어떤 형체도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컵에 담기면 컵의 형태, 병에 담기면 병의 형태, 물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형체를 떠나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물이에요. 부처님께서는 물을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어떤 형체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형체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명(明)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명은 어떤 형체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형체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늘 무엇인가 변화가 야기되는 형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변화라는 것은 어느 순간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때도 있어요. 컵에 가만히 담겨 있는 물을 보고 물은 언제나 이 모습대로 있어야 한다고 집착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변화하는데 잠시 머무는 그 형체를 보고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강하게 집착하는 것, 그렇게 집착된 대상, 집착과 대상이 따로 있겠습니까? 집착은 바로 대상에 대한 집착이니 그걸 무명이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잘 본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의 바탕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무명이 있게 되면 무명을 연(緣)하여 행(行)이 발생하되, 그 무명과 함께 떠오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연하여 있다’의 속뜻이 바로 프라티이뜨야 우트파다(pratitya-utpada, 연하여 함께 올라간다)예요. 그러면 변하고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무명이란 무엇이냐? ‘명이 보이는 일시적 정지상태에 대한 강한 아집, 여기에서 아집이란 정신적인 집착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아집된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관과 객체가 분리가 안 됩니다. 이렇게 무명이 있고 난 뒤에는 이 무명을 연하여 행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행은 무명과 함께 아래의 세계로부터 위의 세계로 떠올라 버린다는 겁니다. 행이란 무엇이냐? ‘변화를 막으려는 결합작용’이 행입니다. 일시적 정지 형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지의 상태에서 변화의 상태로 넘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변화하지 않으려고 집착하는 게 아집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변화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활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물질에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떤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타성이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흩어질 존재들에는 그 흩어짐을 막고, 그 존재들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결합행위가 존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변화를 막으려는 결합행위’를 행이라고 보면 됩니다. 무명이 없으면 행은 발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겁니다.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다’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뒤집습니다. ‘행이 있으므로 무명이 있다’로 넘어가 버립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에서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로 돌아와 버립니다. 이것은 모두가 행과 무명이라는 두 지분이 연하는 관계에 바탕하여 ‘함께’ 올라감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세 번째 지분은 식(識)입니다. 결합된 것〔行〕과 결합되기 전의 것〔無明〕이 완전히 다르다라고 판단하는 것, 또는 그렇게 달라진 것 그것이 식입니다. 오온설에서는 행이 있으려면 행(行) 앞에 상(想)이 전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이 필요 없습니다. 지분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온은 식으로 끝나버리지만, 그러나 12연기에는 식 다음에 무엇인가 또 나타납니다. 무언가가 식을 의존하여 식과 함께 위로 올라간다는 거예요.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명색(名色)입니다. 이것이 또 무척 어렵습니다. 색이라는 것은 물질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물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견유대색〔有見有對色:보이기도 하고 걸리기도 하는 색〕, 무견유대색〔無見有對色:보이지도 않는데 눈 외의 다른 인식기관에 걸리는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같은 것〕,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보이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는 색〕이 있습니다. 이 무견무대색을 두고 세친(世親, Vasubandhu)은 무표색(無表色)이라고 표현합니다. 무표색이란 우리가 업(業)을 짓게 되면 업의 그림자가 우리 몸 속에 남는다고 그래요. 그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이 무표색이 우리가 죽은 뒤에 다음 생에 그 과보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표색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유부(有部)라는 부파 등에서 지어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량부에서는 선정(禪定) 속에 나타나는 색을 무견무대색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명색(名色)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흔히 명이라는 것을 정신적인 것, 색을 물질적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든 색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색이 사라져도 남습니다. 그러나 색은 이름이 생길 수 있는 근거는 되어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못한 것의 공존체, 이것이 명색입니다. 그러한 명색과 식이 함께 떠오른다는 겁니다. 명색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육처(六處)입니다. 물론 육처도 설명이 더 필요하기는 해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갖고 있는 안이비설신의는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이것들이 나타날 수 있는 근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어떤 문제를 푸느냐 하면, 어떤 생물들은 더듬이로 인식을 해요. 더듬이로 인식하는 생물들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지도 못해요. 오로지 더듬이가 인식기관이에요. 우리로 치자면 더듬이가 몸이겠지요. 따라서 그 중생에게 있어서 세상은 촉감뿐입니다. 또 어떤 중생은 거기에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기능이 조금 첨가가 돼요. 또 어떤 중생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이 첨가되고, 또 어떤 중생은 들을 수 있는 기능까지 첨가가 되고, 최종적으로 보는 것까지 가능한 중생이 있어요. 그게 포유류고 우리 인간이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물질을 인식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촉감하는 것 외에 대상의 전부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없을까요? 아직 진화론적으로 덜 발달되었을까요, 아니면 이게 끝일까요? 그 답이 육처에서 풀린다고 하니 잘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 다음 육처에서 촉이 발생합니다. 앞서 육육법이나 업설을 이야기할 때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 촉에서 기억이 깨지는 단계가 풀립니다. 핵심은 이러한 것들이 서로 의존하면서 함께 올라간다는 겁니다. 함께 덩어리를 이루어서 붕 떠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올 때는 처참하게 죽는 거예요. 12연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원래의 자리인 명(明, vidya)의 자리로부터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는 겁니다. 그 위에 또다시 오온(五蘊)적인 구조가 덮이고, 그 위에 육육법(六六法)적인 구조가 또 덮이면서 육근(六根)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와 갖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죽음이 오는 겁니다. 이러한 촉 이후에 수(受)가, 그리고 애(愛), 취(取), 유(有)가 발생하고 이어 탄생하고 죽게 된다는 교설이 12연기입니다. 종교는 죽음을 극복하는 겁니다. 그럴려면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무엇을 죽음이라고 하느냐? 무명(無明)으로부터 연기한 것을 죽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무명을 제거하고 무명이 제거됨으로써 행이 제거될 것이고, 식을 제거하고, 그리하여 유(有)까지 제거되면 죽음도 제거될 것이다. 그런 구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제거하죠. 아울러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정말로 죽음에까지 이르는가를 긍정해야 합니다. 틀림없이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이 무명으로부터 연하여 함께 일어난 열두 가지 지분들이 모여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명을 알려면, 성립근거인 명을 알아야 됩니다. 또 차제성(次第性)으로서의 성립근거인 오온, 육육법, 12처를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가가 명료해지는 겁니다.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조금씩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12처, 육육법, 오온, 12연기까지 얘기하면서, 우리 인간이 어떤 구조로 형성되어 있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구조적으로 해부해 본 셈입니다. 모든 것 안에 죽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구조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야겠지요. 이 구조 속에서 벗어나서 무명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 실천하는 수밖에 없어요. 수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제거한다고 했을 때, 아는 것도 수행이 되고, 제거하는 것도 수행이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수행(修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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